원료인 '섬유 비즈니스화' 주목
25세때 일본행 공업학교 유학도
3년여의 양말 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친동생인 정재찬과 함께 1932년 6월 서문시장 모퉁이인 대명동 149에서 양말직조기 1대와 양말목 제조기 1대로 소규모의 양말공장인 삼호막대소를 설립했다. 삼호그룹의 모체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내의, 장갑, 타올, 양말 등 메리야스 제품이 들어온 것은 1780년대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한복생활문화 때문에 수요가 부진했다.
1906년에 포목상인 김기호(金基浩)가 평양 계리에서 일본으로부터 직기 4대를 수입해 생산을 개시했다. 국내 최초의 양말제조 공장이었다.
자수성가형 기업가 손창윤(孫昌潤,1891~?)은 평양 기독교계의 거물 실업인 박치록이 경영난으로 1907년에 폐업한 양말공장을 인수해서 1909년에 삼공(三公)양말공장으로 재발족했다. 사업이 번성하면서 내의까지 생산함은 물론 양말기계 제작을 목적으로 삼공철공소도 설립했다.
1920년에는 삼공상회를 설립하는 등 수직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1922년 4월에 공신합명회사(共新合名會社), 대동(大同) 등 평양의 11개 양말공장을 규합해서 양말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자신은 초대 조합장이 되었다.
삼공양말공장은 1935년에 양말직조 자동직기 110대, 수동직기 500대와 내의, 장갑, 타올, 목도리를 짜는 기계설비에다 850여 남녀 직공들이 근무했는데 삼공양말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기가 높은 탓에 만주에까지 수출할 정도였다.
서울에도 1909년 이후부터 양말공장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9년 9월의 '황성신문'에는 서울 아현동의 양말제조판매소 주인 서상팔 명의의 '우리나라에서 제조하는 양말'과 '좋은 재료로 싼값에 파니 동포들은 속히 구매하라'는 내용의 광고가 등장한다.
그해 10월에는 중곡염직공작소 주인 김덕창이 '업무 대확장'이란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고 '삼합사(三合)양말을 10전에, 모자는 40~50전에 판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주문을 하면 소포로 부쳐준다고 했다. 김덕창은 양대호 등과 함께 일제하의 서울 염직업계의 리더 기업가였다.
1920년대부터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다수의 양말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양말산업은 내의 생산 공업, 고무신 공업과 함께 일제하의 대표적인 민족산업으로 부상했다.
최봉인(崔奉因)은 대구에서 최초로 자동양말기계를 도입한 경북 메리야스공업 선구자였으며 1930년대 말에는 대구의 농진상회가 50여명의 직공을 거느린 전국유수의 양말공장으로 성장했다.
양말을 짜는 데는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지 않았다. 미숙련자가 며칠 동안만 수련 받으면 기계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적은 자본으로 직기 한두 대만 갖추면 얼마든지 창업도 가능했다.
초창기 절대다수의 양말공장 경영자들은 상점의 사환 출신으로 이들은 근검절약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직기 한두 대를 갖춘 생계형 오너경영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상리(商利)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신의를 지키고 계산에도 밝았다. 정재호도 초창기 국내 양말산업을 이끌었던 선구자들을 롤 모델로 해서 소규모 양말공장을 창업했던 것이다.
삼호막대소공장은 메리야스, 양말 등을 생산하면서 품질향상에 주력한 덕분에 성장했다. 그 와중에서 정재호는 양말의 원료인 섬유의 비즈니스화에 주목했다. 섬유가 생필품으로서 시장개척이 어느 업종보다 용이할 뿐 아니라 잘만 하면 국내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섬유공업에 충실하고자 25세에 일본에 건너가 무장야(武藏野)공업학교에서 섬유공업에 대해 공부했다. 장차 정재호가 국내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로 도약하기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