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장악에 정치적 참여하거나
집권자와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라도 공적권력 접근 가능
가장 위험한 경우는 시민들 조차
그런 상황 추종 사적 집단화하고
사회가 분열돼 자정능력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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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블랙리스트 사건' 재판장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헌법적 규준으로 '팔길이 원칙'이란 표현을 판결문에 담았다. 정부는 예술활동을 지원하되 '팔길이만큼 거리를 두고' 예술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원칙이다. 더 중요한 의미는 '헌법이 보장한 문화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국정농단 부역자'를 엄벌하라는 촛불의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낮은 형량을 선고한 '적폐판사'에 대한 인신공격성 마녀사냥이 뒤따르고 있다는 관련 기사들이 눈에 띈다.

팔길이 원칙의 정신은 공적 자원의 분배뿐만 아니라 공적 권력의 점유나 행사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평등해야 한다고 확장하여 해석하고 싶다. 공적 권력 자체도 중요한 사회적 자원일 뿐만 아니라 자원분배의 차별이 권력과 지위의 잘못된 분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집권세력이나 그 지지자 집단들이 공적 권력에 대한 우선적이고 배타적인 소유와 통제를 원하거나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바뀌면 역편향의 팔길이 원칙이 다시금 문제 될 수 있다고 쉽게 예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담당 판사에 대한 도가 지나친 대중적 비난 역시 공적 권력에 대한 집단적, 사적 이해가 낳은 결과가 아닌가 싶다.

선출된 권력이든 아니든 공적 지위에서 나오는 공적 권력은 그야말로 공공의 권력이고 공적 자산은 공공의 자산이다. 모든 공적 권력에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장치를 부과하고 그 권력행사의 방향과 범위를 정해 놓은 이유는 공적 권력은 공공을 위해 공정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도 구체적으로는 사람의 기획과 판단에 의해 행사되는 것이니만큼 사적인 요소가 깃들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스스로 공공의 권력임을 제도적으로 구체적으로 늘 드러낼 수 있을 때에 그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그러지 못한 극단적인 경우를 전임 대통령의 탄핵사태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면서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의 우리 사회는 공과 사의 경계가 어디인가에 대해서 별로 밝지 못하다. 사적 개인적 이해관계로 갈등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조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너무도 흔하게 '우리'라는 말을 쓰면서 그 경계를 가르는 노력을 폄하하기 일쑤다. 흔한 예로 드는 영화관 좌석 사이의 팔걸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쉽지 않다. 초등학교 시절 2인 책상의 경계를 둘러싼 싸움은 1인 책상으로 정리되었지만, 영화관 팔걸이는 같이 쓰기도, 한쪽만 쓰기도, 번갈아 쓰기도, 심지어 아예 안 쓰기도 어렵다. 어떤 육군대장 부부는 공관병을 군 직위에 따라 부여된 기능을 수행하는 공적 관계로 보지 않고 사적 관계의 사노비 다루듯 했으니 우리 사회의 공사구분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 수 있다. 대학에서도 교수는 학생을 사적으로 지배하려 들고, 자기와 가까운 신임교수를 뽑기 위해 난투를 불사하고, 보직교수는 자기 학과나 교수집단의 이해만을 대변하려 든다. 기업의 임원은 동문과 동향을 챙기고 심지어 시민단체에서도 사적 관계를 중시한다. 심지어 SNS 등 인터넷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용인하지 못하고 집단적인 사적 점유가 일상화된다. 바라건대 경계가 명확하지 않거든 공적 권력은 행사하지도 말고 공적 자산은 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차라리 팔걸이를 비워두거나 공관병을 없애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적 선출권력은 일정한 가치와 정책을 내세워서 일정한 집단의 지지를 받아 형성된다. 그러나 일단 선출되면 국민 모두를 위한 공적 권력이 된다. 국회는 당연히 다양한 집단과 가치 간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조정된 권력과 정책으로 작동한다. 대통령과 행정부 또한 그렇게 조정된 정책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 그렇기에 장관은 인사청문회를 거쳐서 조정된, 수용 가능한 인물을 임명하게 된다. 청문 대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론과 여론에 의한 국민청문회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부패한 엽관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정치권력은 명실상부한 공적 권력이 된다.

공적 권력 형성의 걸림돌은 정치인들이나 정치세력들이 국가권력에 대한 광의의 팔길이 원칙을 포기하는 일이다. 권력장악에 정치적으로 참여하거나 집권자와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그 누구라도 공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더 우려할만한 사실은 집권세력이 추구하거나 연대하는 가치를 수용한 사람은 그 가치의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라도 공적 권력을 담당할 수 있다고 믿는 점이다. 정치세력이나 정치인들이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국가권력은 사적 권력으로 변모하게 되고 국가권력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만을 가진 팔길이 원칙의 위배자가 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경우는 정치적 지지자 시민들조차 그러한 경향들을 추종하면서 배타적 사적 집단화하고 그 결과 사회가 철저히 분열되어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이다.

/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