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복합체인 '재통합'은 어떨까
몸 담아온 사회·체제로 부터
거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가 되려면
자신을 이상화 하지 말아야

시상식이 거행된 장소가 독특했다. 캠프 그리브스, 판문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수상자는 김석범, '화산도'를 쓴 재일 한국인 작가였다. 김석범은 일본에서 지금껏 '조선' 적을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해온 한반도 통합을 위한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사이요이치(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를 동숭 아트홀에서 혼자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사내 '김준평'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인데,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김준평 역을 맡은 일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이라는 사회를 생존을 위한 투쟁의 무대로 인식하고 본능적인 생존 욕구를 따라 처절하게 적응해 가는 한 재일 한국인의 초상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연기해 냈다.
재일 한국인 문제는 필자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작가 손창섭의 삶과 일본행을 추적한 것도, 그가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유맹'을 책으로 만들며 해설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맹'에는 일제 때 홋카이도로 징용 간 한국인들의 일본에서의 삶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 사내의 행적은 '피와 뼈'에 등장하는 김준평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과연 해방된 다음에도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생활의 필요는 그들로 하여금 일본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 남은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같을 수 없는 삶의 상황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먼저, 그들은 일본이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차별이라는 문제는 그들의 삶의 운명과도 같은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들을 더욱 곤란케 한 것은 그들의 '조국'이 둘로 나뉘어 골육상쟁의 전쟁을 치르고 반목,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적대가 재일 한국인 사회 내부에 그대로 투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재일 한국인들은 구 제국의 이국 땅에서 둘로 나뉜 민족의 불행을 함께 떠안은 채 살아와야 했다. 그들은 한국인이 되거나 북한인이 되거나 일본인으로 귀화를 선택해야 했다. 이도 저도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조선' 적이라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나라의 '국적'이 붙여졌다. 현실의 국적이 없었기에 그들은 해외로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자 김석범이 아직도 이 조선 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을 이야기할 때 197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국민총생산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 1970년대 초 북한에서 유일사상 체계가 확립, '영구불변' 체제로 들어섰지만 반면에 한국도 유신체제라는 종신 집권 체제가 군림하지 않았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 어떤 체제가 더 나으냐 하는 것은 경제적 수준 이상의 문제다. 또한 겉이 같다고 속까지 같은 것은 아니며 외면상의 유사성만에 매달린다면 사회의 전망을 찾는 문제는 미궁, 미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에 살면서 남과 북의 어느 쪽도 아니고, 일본인도 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가? 그는 제국, 식민지 체제의 유산으로서, 이 역사적 유산이 최종적으로 해체되는, 미래의 통합된 한반도를 위해 지금 어느 사회, 어느 체제를 선택하는, 생활의 편리를 외면하며 산다. 오갈데 없는 이상주의자이며 현실에 발 뻗기 어려운 '이데올로그'다. 양분없이, 물없이 사는 식물처럼 그는 허공에 떠서 미래에 뿌리 내리기를 고대한다.
필자는 통일이라는 말을 경계한다. 이 말에서는 왠지 살아온 경험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것보다, 차이를 안고, 새로운 하나, 복합체로서의 하나로 맺어지는 '재통합'은 어떨까. 자기가 몸담아온 사회, 체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가 되려면 자기조차 이상화 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겸허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같은 데서 비무장지대에 대해 많이들 가르친다. 앞으로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그 초록의 야생지대를 이 한반도 남쪽처럼 부동산 투기 대상이 되도록 할까? 북한 땅처럼 황무지로 만들까? 지금 한반도 재통합을 위한 새로운 전망이, 계획이, 겸허가 필요하다. 지금 새로운 역사가 바야흐로 열려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한 '최후의' 시련이어야 한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