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201000454100022061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극의 흐름상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최명길과 김상헌에 비해 그 분량은 아주 적지만 굉장한 무게감이 있었던 청나라 '칸(汗)'이 등장한다. 그는 청태종 홍타이지(愛新覺羅 皇太極·1592~ 1643)를 말한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난 홍타이지는 1626년 9월 칸으로 즉위했는데 그에게는 당면한 과제 몇 가지가 있었다. 초원지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목민들을 통합하고, 식량을 비롯해 부족한 생필품을 백성들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부족한 자원들은 주로 명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얻곤 했는데,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립관계로 돌아서자 교역이 단절돼 생필품의 심한 품귀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부족분을 조선에서 충당코자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왜란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들에게 물자를 대줄 만큼 사정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조선이 인조반정(1623) 후 노골적인 친명배금 정책으로 돌아서자 홍타이지는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계획을 품게 된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무조건 후금을 배척했던 인조(仁祖)는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을 막지 못했고,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를 하고 나서야 겨우 왕위에 복귀한다. 그런데 홍타이지는 철군하면서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인평대군, 일반 부녀자들을 포함한 50여만 명의 조선인 인질을 끌고 청나라(1636년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가 바뀜) 수도인 심양(瀋陽)으로 들어가버렸다.

심양 구도심에서 북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소릉(昭陵)'은 홍타이지의 무덤인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어 몇 해 전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재는 '북릉공원(北陵公園)'으로 불리며 능 안에는 호수와 울창한 수풀이 조성돼 있어 현지인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병자호란 당시 심양에 끌려갔던 인질들 중 일부가 홍타이지의 능을 조성하는데 동원됐다고 하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이렇게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것이다.

/김선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