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이정림, 5년여 점원 생활
21세때 도매상 성공해 사업토대
광복후 고무신 총대리점권 확보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6세 때인 1929년에는 밀가루, 설탕, 고무신 등을 취급하는 도매상점인 송래상회(松來商會) 점원으로 일을 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정림은 송래상회에서 5년 여 동안 점원 생활을 하는 동안 무차입 경영과 대신불약(大信不約)의 신뢰경영, 한 우물 경영 등으로 상징되는 '개성상인정신'과 접할 수 있었다. 개성상인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한반도의 상업을 주름잡았던 상인집단이다.
그들은 독특한 조직체계인 송방(松房)과 차인제(差人制), 그리고 서양의 복식부기보다 앞선 회계시스템인 사개치부법(四介置簿法)을 남겼다. 이정림은 송래상회 점원생활을 통해 개성상인의 후예로서 철저한 상도(商道)를 터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림은 21세 무렵인 1933년에 개성에서 '개성서(西)고무제품직물도매상'을 차려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1940년에는 경기도고무조합 이사로 재직하면서 주단포목 도매업도 겸했다.
당시 그는 고무신 장사를 하며 중앙상공의 지배인이던 김용완 경방 명예회장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정림은 도매상 운영으로 큰 이익을 얻었는데 이것이 사업자금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정림은 1945년 광복 후에는 천일고무 이리공장에서 고무신 제조에 주력하였다. 그는 국내 최대의 고무신 메이커로 전남 여수에 위치한 천일(天一)고무의 김영준(金英俊, 1900~1948) 사장과 협상을 벌여 이 회사의 경기, 황해, 강원도 일대의 총대리점권을 확보했다.
김영준은 15세에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출발해 고무배합기술을 익혀 1926년에 부산에서 천일고무공장을 세워 고무신을 생산했는데 품질이 우수해 단기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선발업체이던 환대고무(丸大護謨)의 상표 도용 시비로 도산하고 말았다.
일본 신호(神戶)시 송야통(松野通) 2정목6의 환대고무가 한국에서 고무신의 생산판매를 목적으로 1926년 4월 1일에 부산부(釜山府) 대창정(大倉町) 10번지(현 부산 중구 중앙동 옛 부산역 인근)에서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한 한국 굴지의 고무신 메이커였다.
김영준은 1935년에 전남 여수에서 천일고무를 재설립해서 불과 3년 만에 전국을 석권하는 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정림은 김영준 사장과의 각별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영준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반란 주체인 좌익계 군인들에 의해 부르주아 기업인으로 지목돼 처형 되면서 관계가 막을 내린다.
이정림은 1946년에 서울에서 무역업체인 이합상회(二合商會)를 개업했다. 1949년에는 고향 후배이자 OCI그룹의 창업자인 이회림(李會林, 1917~2007)을 영입해 이합상회를 개풍상사(開豊商社)로 변경하고 정식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1950년 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해 텅스텐의 일종인 창연(蒼鉛)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필수품을 수입해 부를 축적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