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죄중 5·16 발발… 정부이관
처벌대신 석방 '산업역군 둔갑'
전후 부흥 및 경제개발사업에 따라 시멘트수요는 갈수록 크게 늘어났음에도 공급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1961년 말 우리나라의 시멘트 총생산능력은 72만t에 이르러 어느 정도 공급부족이 해소됐으나 여전히 시멘트는 웃돈을 주고도 못사는 인기상품이었다.
대한양회는 이양구가 경영하던 동양시멘트와 함께 국내 시멘트시장을 분할지배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국내유수의 재벌로 부상했다.
한편 이정림은 산업자본의 금융자본화를 추진하게 되는데, 계기는 1959년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의 창립이었다. 서울은행은 지방은행으로 인가를 얻었는데 당시 대한양회공업이 이 은행의 주식 74%를 확보해서 오너경영인이 된 것이다.
삼성, 삼호, 동아상사(이한원) 등이 귀속은행주 민간불하에 편승해 금융자본화 했던 반면, 개풍그룹은 은행 신설에 편승해 목표했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일반은행의 민영화는 재계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던 신생기업들이 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국내 정상의 재벌로 급부상한 것이다. 당시 은행을 불하받았던 재벌들은 모두 권력과 유착돼 있었다. 자유당독재 하에서 정경유착이 빚은 결과물이었다.
개풍그룹 또한 금융재벌로 변신한 이래 활발한 다각화 사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9년 현재 개풍그룹은 모기업인 개풍상사를 비롯해 대한양회, 호양산업, 배아산업, 대한탄광, 삼화제철, 동방화재, 대한철강 등을 거느려 삼성, 삼호에 이어 재계 랭킹 3위의 대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높다 했던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개풍그룹은 시련의 계절을 맞는다. 과도정부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권력을 배경 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에 대한 단죄작업에 착수했다.
정부는 7월말에 기업가 23명을 부정축재 기업인으로 지목했다. 삼성(이병철) 삼호(정재호)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럭키(구인회) 동양(이양구) 극동(남궁련) 등 195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한 재벌기업의 총수들이 전부 포함됐다.
정부가 8월 31일에 기업가 24명, 46개 기업들에 대해 벌금과 추징금을 합산한 총 196억 환을 해당 기업들에 통고하고 일주일 이내에 납부하도록 하자 해당기업들이 반발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4월 10일에 정부는 '부정축재자처리법'을 마련하는 한편 5월 17일까지 2주간을 자수기간으로 설정하고 내부적으로 이들에 대한 처벌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수기간 종료 하루전인 5월 16일에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이 작업은 군사정부에 이관됐다.
1961년 5월 28일 혁명군 특별수사대가 탈세혐의가 있는 기업인들을 서울 일신국민학교로 연행했다. 이때 연행된 기업인은 정재호, 이정림, 설경동, 남궁련, 이용범, 조성철, 함창희, 최태섭, 박흥식 등이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 백남일, 이양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5월 30일에는 이한원과 김지태가 구속됐다. 각 지방에서도 지방의 유력 기업인들에 대한 검거작업을 진행, 금호그룹 창업자 박인천도 구속됐으나 우여곡절 끝에 벌금형으로 변경했다.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했던 군사정부는 국민적 지지 확보를 위해 과거청산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의 이주일(李周一) 위원장은 "부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며 석방을 발표했다. 범법자들이 산업역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로써 1960년 4·19혁명이후 1년여 동안 지루하게 끌어오던 부정축재자 처리문제는 일단 종결됐다.
추징금은 30개 기업에 총 83억환이 고지됐는데 이중 이병철 24억환, 정재호 10억환, 이정림 5억5천만환, 이한원 4억환, 설경동 3억3천만환이었다. 그러나 12월 30일에 발표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부정축재 위원회에서 최초로 발표한 부정축재액 726억 환의 5.8%에 불과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