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잘못 적폐로 질타하면서
그 책임 누군가에 묻기 보다는
모두의 거룩한 희생 수용 필요
누구도 국가에 헌신 역할 없다면
끝없이 요구하면서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길 찾기 마련이다


2017112001001362600064801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케네디대통령은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세요."라고 요청한다. 문재인대통령은 "국민들이 '국가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두 대통령의 말은 언뜻 상보적으로 보이지만 국민들에게 국가를 보는 상반된 관점을 제시한다.

1990년대 초반에 필자는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했었다.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여야 거물급 정치인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등이 된 이들도 있었다. '신성한 국회의사당'의 뒤편에서 이른바 '4류 정치인'들의 부패나 무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난감했던 사실은 그들 구세대에게는 이른바 "애국심"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치적 스승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내세웠다. '추한 담합'으로 지탄받으면서도 '국민과 국익을 위하여' 협상할 줄 알았다. 그들보다 젊은 정치인들도 그 애국심을 폄훼하지 않았다.

반면, 당시 86세대나 X세대에게 '민주화된' 국가는 군부권위주의체제의 잔재와 IMF위기를 촉발한 무능정부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국가를 공격하여 시민의 자유, 민주, 나아가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가는 헌신과 봉사의 대상이 아니고, 그 약탈과 지배로부터 자기보호와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애국심이란 애초에 보이지 않거나 또 다른 정치적 억압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사회과학계에 뿌리내린 맑스주의 또한 젊은 세대의 경험적인 국가개념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맑스주의는 사회가 계급들로 구성되고, 국가는 명목적일 뿐이라는 국가론과 계급론을 제공하였다. 사회 안에는 계급간의 투쟁만 존재할 뿐이고 국가는 특정 계급의 공동관심사를 다루는 위원회에 불과했으며, 소외되고 배제된 계급들에게 국가는 폐기의 대상이었다. 어떤 국민들이 체험을 통해 국가의 존재를 재구성했던 반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국가를 부정하는 길을 밟았다.

국가가 원천적으로 부정되면 국민이 국가에 바쳐야할 헌신과 의무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들은 링컨, 케네디, 그리고 처칠에게서 국가를 배운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 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는 내용으로 국가의 존재와 그 국가의 민주주의를 위한 거룩한 희생과 지속적인 헌신을 웅변함으로써 미국 애국주의 전통에 기여했다. 처칠은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는 달리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전쟁으로 절망한 국민에게 달콤한 희망 대신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호소하였다.

국가가 부정되고, 국가가 사적 정권 혹은 정파적 정부와 동일시되면 국민은 국가에 대해 뭔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상상적 국가를 채울 국민들의 헌신은 '금모으기 운동'을 넘어선다. 그러나 국민들은 요구하고 정부와 정치권은 대답하는 형국이라면, 국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국민들은 소외되고 수동적인 객체로 둔갑한다. '민주'는 살아있으나 '공화국'은 사라진 기형이다. 국가와 더불어 모든 조직공동체들이 부정되면서 노동자, 공무원, 교직원, 군인 등이 오로지 요구만 한다면 기업, 정부, 학교, 군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중동의 건설노동자, 대학의 과학기술자들, DMZ의 군인들, 바다의 등대지기들, 그을린 농부들이나 원양어선의 선원들 등을 과거 권위주의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불러내어 그들의 국가에 대한 헌신을 국민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은 어떤가?

국가의 잘못을 적폐로 질타하면서 그 책임을 누군가에 묻기보다는 남군과 북군 모두의 거룩한 희생으로 수용하면서 국가를 위한 헌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방법이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누구라도 국가에 헌신하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끝없이 요구하면서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길을 찾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 모두의 국가는 사라지게 된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