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잘못 지적 '나쁜 사람'으로 찍혀 쫓겨나
권력·부 유지위해 최고권력자에 충성할 수밖에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부패 권력 행태·결말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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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
조선 광해군 시대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은 권력의 정점에서 국정을 농단하다 인조반정 후 참형된 간신(姦臣)이다. 그에 대한 자료를 보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했다.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가르치는 교사를 역임하여 신임을 쌓았다.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됐다.'고 정리돼있다.

이이첨은 관직에 나선 이후에도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경계를 받았으나 젊었을 때는 기개가 있고 지조를 아는 선비였다고 한다. 그런 이이첨이 간신으로 변한 이유는 '배고픔에 반 실성한 아내' 때문이었다. 그는 살림이 어려워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책 읽기에만 몰두해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방 벽에 얼굴을 대고 뭔가를 핥고 있었다. 이이첨이 아내의 어깨를 잡아당겨 보니, 얼굴이 먼지와 눈물로 얼룩진 채 반쯤 실성한 상태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벽지에 발라져 있던 풀기를 핥고 있었던 것이다. 이이첨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집을 뛰쳐나가 당대 권력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는 권력가들에게 아첨한 끝에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고, 원했던 권력과 부를 손에 쥐고 전횡을 일삼다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벽에 발라져 있는 풀을 핥는 아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무리 기개와 지조가 강한 선비라고 해도 정신줄을 놓은 아내를 옆에 두고 책만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이첨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이 부패한 권력이었다는 것이다. 이이첨의 개인 사정은 눈물겹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 결국, 그로 인해 자신과 아들들까지 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이첨의 콤플렉스는 '배고픔에 지쳐 실성한 아내'였다. 과거에서 장원한 재원이 요즘 말로 '눈이 돌아' 선비의 지조를 굽히고 아첨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거기에 광해군의 신임은 그의 인생에 '독(毒)'이 됐다. 최고 권력을 쥔 사람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를 이용해 부정하게 권력에 기대려는 수요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부패한 권력과 부의 결말은 '파국(破局)'이었다. 이이첨도 말년에 "나는 부귀가 넘치고 죄가 커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권이 바뀐 이후 전 정권하에서 최고 정보기관 수장을 지냈거나 최고 국방기관의 장을 지낸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겠느냐. 최고 권력자 잘못이지 명령에 복종한 것을 두고 너무 심하게 다루는 것 아니냐"는 반응과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자에게 아첨을 일삼고 뇌물을 준 행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까지 시각도 다양하다. 부패한 권력에서 충신(忠臣)은 살아남기가 힘든 법이다. 옳은 말을 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순간 최고 권력자의 눈 밖에 나고, '나쁜 사람'으로 찍히면 자리에서 쫓겨나는 세상이다. 그러한 정권에서 권력과 부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최고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나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부패한 권력의 행태와 결말은 다르지 않다.

/이진호 인천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