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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바나나가 너무나 흔한 과일이 돼 쳐다보지도 않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나나를 먹어본 경험이 곧 부의 척도가 될 정도로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500원일 때 바나나 한 송이가 1만 원 정도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 정부가 국내 과일 재배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소량 재배한 바나나와 대만, 필리핀 등과의 구상무역(금전 수수 없는 물물교환)으로 항공냉장 운송을 통해 들여온 아주 적은 양의 바나나만 유통 시켰기 때문이다.

바나나를 먹고는 싶지만 높은 가격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 서민들의 마음을 잘 알았는지 한 빙과 회사에서는 1974년 '바나나맛 우유'를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고 대성공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우유를 통해 바나나의 맛과 향이 어떤지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말 그대로 바나나 '맛' 우유였기 때문에 실제 바나나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2010년에 와서야 진짜 바나나 과즙이 첨가됐다.

아무튼 바나나맛 우유는 우유 단일상품으로 국내 최초 연매출액 1천억 원을 돌파하는 등 4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바나나맛 우유가 많이 팔린 곳은 다름 아닌 목욕탕이다. 30대이상의 남성들은 아버지와 동네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바나나맛 우유에 빨대를 꽂아 먹었던 기억이 대부분 있을 것이다. 이런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요즘에도 자신의 아들에게 바나나맛 우유를 사주는 아버지들이 많다.

그런데 최근 한 소비자단체가 시중에 유통되는 여러 종류의 바나나 우유를 비롯해 딸기우유, 초코우유 등 가공 우유 제품 중 원유(흰우유)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제품이 25%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딸기·초콜릿·바나나 등의 맛이 나는 가공유 60종을 조사한 결과 원유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제품이 15개라고 파악한 것. 이들 제품 대부분엔 원유가 아닌 환원유(탈지분유를 물에 녹여 버터·크림을 첨가한 것)가 사용됐다. 원조 '바나나맛 우유'의 원유 함량은 85.7%로 시중에 유통되는 바나나 우유 계열 중에 가장 많은 원유가 들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그나마 원조의 자존심을 지킨 셈이다.

/김선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