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문학산등 요지 눌러앉아
병력·물자 전국 공급 '심장' 역할
원주인 주민들, 수십년간 밀려나
인천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곳곳이 사실상 '미국 땅'이 되어버렸다. 원래 땅 주인인 인천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 땅을 밟지 못했다.
이때 인천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출입구이자 병력과 물자를 전국의 미군기지로 뿌리는 심장 역할을 했다. 인천항과 월미도에서부터 인천 주요 도심을 거쳐 부평 애스컴(ASCOM·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까지 '미군기지 벨트'가 형성된 이유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진주해 부평에 있는 당시 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 주한미군 보급수송본부로 썼다.
1949년 6월 잠시 한반도에서 철수했다가 한국전쟁 때 돌아온 미군은 부평에 '캠프마켓', '캠프하이예스', '캠프그란트', '캠프타일러', '캠프아담스', '캠프해리슨'을 비롯한 미군기지들을 조성하고 '애스컴시티(ASCOM City)'라 명명했다.
각 미군기지에는 보급창, 주한미군 신병보충대, 주한미군 야전병원(121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등 수십 개의 단위부대가 주둔한 군수보급기지였다. 주한미군 교도소도 애스컴시티에 있었다.
부평 남쪽으로 백운역 일대부터 북쪽으로 한국지엠 인천공장 근처까지 조성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모두 미군기지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 부평지역 미군부대가 용산과 평택 등지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축소된 캠프마켓만 남았다.
아직도 캠프마켓에서는 주한미군에 보급하는 빵을 만드는 시설이 가동된다. 캠프마켓은 인천에 마지막 남은 '미국 땅'이다.
애스컴시티는 일본군 군수공장이던 일제강점기부터 인천항과 연결돼 있었다. 이 때문에 주한미군의 보급항인 인천항도 미군이 일부 차지해 1971년까지 미군전용부두로 사용했다. 인천항 주변으로는 미 육군과 해군을 비롯한 항만지원부대가 주둔했다.
현재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월미도 또한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1971년까지 미군부대가 있어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 통로인 인천항을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인천항으로 들어온 미군 식량·피복·유류 등은 인천항 주변 곳곳에 조성한 미군 창고에 보관됐다. 특히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 일대에는 대규모 미군 유류저장소(POL)가 있었고 '캠프유마', '캠프레노' 같은 유류저장소를 관리하는 미군부대가 주둔했다.
미군이 쓸 기름을 수송하기 위한 송유관이 철도를 따라 지상에 깔리기도 했다. 남구 숭의동 일대에도 '캠프에딘버러' 같은 미군부대가 있었으나, 사진으로만 남았을 뿐 부대의 기능과 규모를 자세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문학산 정상은 미군이 1959년 기지를 조성해 1970년대 초까지 주둔했다. 이후 한국군 공군이 차지했다가 지난 2015년에야 시민에게 개방했다. 문학산 꼭대기에는 미사일통제소가, 인근 봉재산에는 미사일 기지가 있었는데 2005년 영종도로 이전했다. 강화 고려산 꼭대기에는 미군 통신부대가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고려산 아래에 일명 '양공주'들이 모여 살 정도로 미군부대 규모가 컸다는 게 강화 토박이들의 얘기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