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몸이 없다고 학대하는 인간
기계 아닌 여성·아동·빈곤층 등
물음도 없이 폭력 대상될 수 있다
왜 다르고 함께 살 수 없는지?
누가 질문하고 질문하지 않는가
한 부부가 아들을 대신할 로봇을 입양한다. '엄마'라고 부르는 인공지능과 교감하며 차츰 정이 들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데이빗'이란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다. 하지만 냉동 중이던 진짜 아들이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데이빗의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어느 날 생일 파티에 온 아이들은 데이빗을 장난감처럼 취급하며 괴롭힌다. "넌 우리와 달라, 넌 가짜고 우리는 진짜야, 넌 메카, 난 올가라구!" 겁에 질린 데이빗은 "도와줘!"를 외치며 가짜 형제를 껴안은 채 물에 빠진다. 그 일로 데이빗은 인간 가족에게서 영영 버려진다. 진짜 인간들은 메카와 올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구분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짜 인간은 질문을 한다. 어째서 난 메카고 넌 올가지? 어째서 난 가짜고 넌 진짜지? 오직 로봇만이 왜냐고 묻는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다름에 대해서. 그의 질문은 왜냐고 묻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면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하면 엄마의 진짜 아이가 되어 함께 살 수 있느냐고.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 나선다.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자기에게 아무런 정보도 입력되어 있지 않은 낯선 세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계속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성장한다.
올가와 메카 사이에서 나는 누구냐고 묻는 그의 질문을 통해, 나는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묻지 않는 중요한 물음을 발견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단지 인간은 유기체고 로봇은 기계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질문하는 존재'는 그런 이분법을 거부한다. 나는 왜 다르냐고 그가 질문하는 순간, 기계냐 유기체냐 라는 물성(物性)에 의한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근대 인간은 인간을 다른 종과 구분하는 것이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이성적 동물'이란 동물성을 열등한 것으로 놓고 이성을 우위에 놓는 사고를 반영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 속 미래의 인간은 인간이라는 증거를 이성이 아니라 동물성(orga)에서 가져온다. 인공지능인 데이빗은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똑같지만, 살아있는 몸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르다.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과 달리 그는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다. 하지만 오늘의 인간은 기계의 일부가 되었고, 기술융합적인 존재로 진화했다. 현대 인간은 모두 '기계 없는 몸'을 상상할 수 없는 메카-올가적 존재이며 기술은 생존의 조건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인가.
영화는 인간성을 저버린 인간을 보여준다. 로봇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면서도 로봇을 차별하는 인간. 그게 너무 당연해서 질문할 필요를 모르는 인간이다. 이성이 없다는 이유로 동물들을 학대한 인간이 몸이 없다는 이유로 로봇을 학대하지 않을 리가 없다. 로봇을 학대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속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을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는 쇼 장면이 나온다. 그런 폭력은 기계에 대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 존재가 결핍된 존재로 표상될 때, 여성, 아동, 유색인, 빈곤층, 이교도, 성소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북한까지도, 얼마든지 물음이 필요 없는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왜 나는 다른가? 나는 당신과 함께 살 수는 없는가? 여기서 질문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진짜 인간'인가?
/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