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이 바다와 만나 두 길로 나뉘는 물길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 되었다. 역사가 길다. 고려 대몽항쟁기 강화 도읍 시절에 고종이 여기에 와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격려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엔 어떠했나. 후금의 침략으로 조정이 강화로 피해온다. 정묘호란(1627)이다. 그때 인조가 연미정에서 군사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화친 조약을 맺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조약 맺은 장소가 연미정이라고 알려주는 사료는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어디인가? 지금의 강화읍내, 고려궁지와 그 주변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 같다. 이제 그 근거를 살펴본다. 최종 조약을 맺는 1627년(인조 5) 3월 3일, '인조실록' 기록이다.
"이날 밤 상이 대청에 나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행했다. … 예를 마치고 상은 환궁하고 … 오윤겸 … 등이 유해(후금 사신)와 함께 서단(誓壇)에 이르렀다. 호인들이 소와 말을 잡아 혈골을 그릇에 담았다. 이행원이 맹세문을 낭독했다. … 남목태(후금 사신) 등도 맹세하기를, … 하였다. 맹세하는 절차를 마치자, … 접대하는 재신들이 유해를 성 밖에서 전송했다."
인조가 향을 피운 대청마루는 어느 건물의 마루인가. 이형상은 '강도지'(1696)에 '본부(本府)의 대청'이라고 썼다. 본부는 강화도호부를 의미한다(아직은 강화유수부가 아니다). 의식을 마친 후 인조는 행궁으로 돌아갔다. 오윤겸 등이 후금 사신 유해를 데리고 서단으로 가서 맹약한다. 그리고 성 밖에서 유해를 배웅한다.
이날 화친 조약 체결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셈이다. 1부는 도호부 본부에서 인조가 향을 피우고 2부는 서단에서 소와 말을 잡고 양국 신하가 맹세문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서단은 강화도호부에서 멀지 않은 야외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강도지'에 맹세의 단을 설치한 장소가 서교(西郊)라고 나온다. 본부를 중심으로 서쪽 외곽이라는 의미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단을 쌓은 장소가 서문 밖이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후금과의 화친 조약이 맺어진 최종 장소는 지금의 강화 읍내가 되는 셈이다. 조약을 맺고 약 한 달이 지나서 인조가 후금과의 화친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는데, 그 글에서도 맹약의 장소를 '강화의 부(江華之府)'라고 했다(인조실록, 5년(1627) 4월 1일).
그러면, 연미정이 조약 체결 장소로 알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대표와 후금 사신들이 연미정에서 예비회담을 했다. 1627년(인조 5) 2월 15일에는 유해가 화친하게 되면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고 물러가겠다는 맹세의 글을 연미정에서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실록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연미정이 화친 조약을 맺은 곳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연려실기술'에 병조판서 이정귀 등이 연미정에서 조약을 맺은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있으나, 이 역시 예비회담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강화유수 김노진은 강화를 돌아보고 아름다운 경관 열 곳을 뽑아 '강화부지'(1783)에 기록했다. 그중 하나가 '연미조범(燕尾漕帆)'이다. 연미정에 닻을 내린 조운선 풍경 또는 조운선 돛대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해안에 가득한 배, 그 배에서 펄럭이는 돛대, 반짝이는 바다 물결, 뱃사람들의 왁자지껄, 분주하게 오가는 주막 아낙 …. 정말 장관이겠다. 그 생동하는 활기가 문뜩 그립다.
지금, 연미정 주위는 적막. 가끔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뿐. 눈앞의 북한 땅은 정말 코앞인데 그저 바라볼 뿐 어찌하지 못하는 2017년의 세모. 그 옛날 고려 사람들처럼 여기에서 배 타고 개성 가는 날은 언제가 될까.
/이경수 강화역사문화硏 연구원·'강화도史'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