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함'으로 대처해온 우리는
차이와 차별 반복적으로 재생산
자유주의 출발점은 사고의 자유
사회적으로는 사람간의 생각차
인정해주는데서 출발해야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제와 위계적 관료체제로 장착된 한국에서 개인의 자유는 행정편의적 관료주의와 충돌한다. 가령 한국인들은 모터사이클(이륜자동차)의 고속국도 주행이 금지된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총기소지허용을 옹호하는 미국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개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토론되고 사회규범으로 제어되어야 하는 일들이 국가권력의 '금지와 전용' 포고로 대체된다. 그럼에도 정작 최우선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것들은 방치된다. 국가권력의 선별적 차별논리가 개인간의 차별에도 관철된 탓이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수차례 권고하였지만 현 대통령조차 후보시절에 이미 반대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를 뿌리째 균열시킨 계급적·지역적 차별, 그리고 그에 근거한 사회집단간 혐오를 정치적 경쟁에 내맡기고 근절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 보편적이고 덜 가시적인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차별 자체가 부당하다는 인권 차원의 인식을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 극복하기보다는 차별을 정치적 선악으로 대체하여 혐오를 확산시키는 방식을 택했었다.
지역간, 계층간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이 시각을 한반도와 민족의 문제로 넓히고자 했던 세력들에 대해서 '종북좌파'로 매도하여 그 혐오를 증폭시켰다. 특정 지역과 여성에 대한 혐오와 국가를 사유화한 국정농단을 일베와 적폐로 규정함으로써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 유연한 민주화의 길에 동참한 세력을 모두 배제해버리고 있다. 어떤 나라가 종북좌파와 적폐세력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왜란과 호란의 와중에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백성과 국토의 유린을 방치했던, 그리고 사색당파 싸움으로 나라의 비전과 인재들을 고갈시켰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는 상이한 사회세력과 정치적 목소리, 그리고 사회구성의 비전이 경쟁하면서 진행된다. 때로는 협력을 통해서 때로는 정반합의 논리를 통해서 역사발전에 기여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경험이 부재한 우리 사회는 차이의 논리를 선악의 논리로 바꾸고 나아가 최악의 순환적 차별논리를 만들어낸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그러한 독선적 논리를 키워왔다. 한때는 반공과 정치발전론, 그리고 산업화론이 그랬었고 맑스주의나 주체사상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역시 그러한 사상적 검증의 규준으로 작동한다. 심지어 친노, 친박, 친문의 이름으로 어설픈 정치논리조차 그러한 독선적 검증규준에 나선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른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로 영악하게 대처하고 있다. "힐러리가 대통령답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는 트럼프의 정치적 산술에서 보이듯이. 그러나 그러한 자유주의의 부재 혹은 우회로는 민주주의를 더 심화시키기 어렵다. 타인의 생각을 '정치적 올바름'의 배타적 기준으로 재단하는 방식이나, 그에 대해 '정치적 영악함'으로 대처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온 우리 사회는 차이와 차별의 문제가 해소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재생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사고의 자유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사람간의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생충학자 서민교수나 배우 유아인 씨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도 이제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생각의 차이를 열어가는 단초가 아닌가 싶다. 경제학자 대니얼 카머넌이 말한 '시스템1'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로 보고 싶다. 복잡한 사회적 쟁점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는 사안들에 대해서 직관과 감성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그 프레임으로 타인들의 사고를 얽매는 데 익숙하고, 다른 쪽에서는 침묵하거나 거짓 동조하는 '정치적 영악함'으로 대처하는 자유주의 부재의 침묵의 사회를 이제는 보다 본격적으로 해체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