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는 동안
어느덧 '괴짜 신부'·'날라리 신부'
"신부가 뭐 저래?" 수군대지만
좀 어떤가 내가 행복하고
남도 행복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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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
사제가 된 지 7년째 접어들 무렵, 한 3년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당시 중국은 개방은 했지만 종교에 관해서는 여전히 삼엄한 장벽을 치고 있었던 터라, 우리 신부들 사이에선 '대만 신부가 중국에서 선교를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더라', '어느 프랑스 신부가 중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알고 보니 남몰래 포교하다가 중국 공안에게 살해당한 거라더라'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향이 얀삐안(鹽邊)인 주교님으로부터 중국으로 떠날 지원자를 받는다는 모집령이 떨어진 것이다. 중국엔 관심도 없었고, 더구나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을 할 소명감 따위는 털끝만치도 없어서 모집령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눈치 없는 후배 신부가 순진한 얼굴로 찾아와서는 "형님, 저랑 같이 가요"하는 거였다. 선배된 체면에 겁나서 못 가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우리 교구에 속한 신부만 해도 200여 명인데, 설마 내가 뽑히겠어?'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지원한 지 며칠도 안 돼 주교님으로부터 "어려운 자리에 지원해줘 고맙다"는 전화가 걸려왔다.(그 전화를 받고 얼마나 벽에 머리를 박았는지 모른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인사공문을 받아들었는데, 좀 이상했다. 사유란에 떡하니 적힌 '중국 유학'. 선교하러 가는데 웬 유학이냐고 물으니, 중국은 성직자 입국이 금지되어 있으니 일단 유학생 신분으로 위장해 입국을 하란다.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싶었다.

겁을 잔뜩 먹고 시작된 중국행은 생각보다는 살벌하지 않았다. 단지 더러운 환경 속에서, 한국에서 살던 때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는 불편이 더 컸다. 수돗물이 순환급수제여서 모임에서 식사를 하다가 집으로 달려와 수돗물을 받아놓고 다시 외출을 해야 하고 자동차는 꿈도 못 꾸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는 데 겨울에 영하 30도를 뚫고 가야 하는 일, 앞에 가는 자전거 탄 사람이 뱉은 가래침을 얼굴에 맞아야 하는 일 등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무엇보다 제일 힘든 것은 신부라는 권위를 송두리째 내려놓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특히 성당 안에서는-왕 노릇을 하다가 그곳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중국의 일개 인민으로 살아야만 했다. 중국 사람들을 만날 때 한국에서의 직업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신부'라고 대답하면 중학교 중퇴자 정도의 사람으로 취급을 당한다. 중국 신부가 나온 중국신학교는 사설학원 같은 곳이어서 정규대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신부들이 중국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덩달아 나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이런 상황을 견디는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중국을 다녀온 뒤 내 사제 생활은 전과 참 많이 달라졌다. 아니 내가 달라졌다기보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미사 후 신자들과 인사하는 것이 피곤해 사제관으로 들어오던 것은 옛말. 한 사람이라도 더 손잡고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저 내가 생각한 신부의 모습에서 한 계단 내려온 것뿐인데, 이상하게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전에는 문득문득 가슴을 후비던 고독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신기한 건 20여 년 전의 내 사진과 요즘 내 사진이 참 다르다는 것이다. '자뻑'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젊었을 때보다 지금 모습이 훨씬 매력적이다. 머리숱이 줄고 배가 좀 나왔지만.

좋아하는 어구 중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위도일손 爲道日損)'이라는 말이 있다.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며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는 동안 어느덧 괴짜 신부, 날라리 신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부가 뭐 저래?" 하고 수군대는 소리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내가 행복하고, 더불어 남도 행복해 질 수 있으니 말이다.

/홍창진 수원교구청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