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진심을 다해 호소하면
상대방 감동시켜 솔직함과
진정성 때문에 도와주려 애쓴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세계 어느 곳 어느 시대나 통하는
대단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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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애 변호사
상담을 하다보면 말은 어눌하지만 표정과 기록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계속 듣다보면 그 억울함이 전해져서 어느새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 연구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반면 말도 유창하고 표정도 진지하지만 뭔지 모르게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을 때도 있다. 그래서 유능한 변호사일수록 의뢰인과 신뢰를 쌓기 전에 기록 검토와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해 점검을 하고 진실을 파악한 후에야 의뢰인을 전적으로 믿고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벌써 17여 년 전, 극빈자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을 해주던 법률구조공단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가정을 꾸린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자신의 이웃집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구속된 사건을 변호하게 되었다. 구치소로 절도 피고인을 만나러 갔더니 얼마 전 직장을 잃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생활비라도 집에 가져가야한다는 생각에 우발적으로 죄를 짓게 되었는데 피해자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아무런 죄도 없는 자신의 처가 이웃집에 찾아가 문전박대당하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그의 처는 생후 10개월 된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날마다 찾아가 피해자와 합의를 하려해도 만나주지조차 않아서 합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재판 받는 동안 절도범의 아내는 나와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를 업은 채 사무실에 들러서 어느 날은 음료수 1병이라도 어느 날은 빵 한 봉지라도 놓고 갔고, 매번 올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는지,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는데 이런 모습을 친정에서 알게 되면 안 된다며 피해자와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지 자신의 신세 한탄과 하소연을 담은 짧은 편지를 전해주고 갔다. 나는 그 가정을 진정으로 구해주고 싶었다. 직장을 잃은 젊은 가장의 절박함과 아내 사랑이 절절해서 없는 문장 실력으로 피해자에게 무작정 편지를 쓰게 되었다. '돈을 주고 선임한 변호사도 아니고, 돈 없는 사람을 무료로 변호해주는 가해자의 변호사인데 월세 방 보증금이라도 빼서 합의를 하려는 의사가 있으니 제발 그 처를 만나만 달라.'고 호소했다. 기록상으로도 워낙 피해자의 의사가 강경하여 긍정적인 대답이 올 것이라고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뒤 피해자의 처가 밝은 얼굴로 합의서를 가지고 찾아왔다. 게다가 그 피해자분은 피고인의 처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당신 남편의 변호사가 쓴 글을 보니 사정이 딱하더라. 크게 뉘우치고 있다고 하니 그 말을 믿겠다. 아이를 봐서라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서 아무런 돈도 받지 않고 합의서를 써주었다고 했다. 물론 결과 역시 좋았다. 석방되어 나온 피고인 부부가 일부러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전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 끝이 발개졌다. "의뢰인이 변호사를 감동시켜야 변호사도 판사를 감동시킬 수 있다." 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형사사건을 하면서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것은 위 절도사건 이후로 딱 한 번 더 있었을 뿐이다. 그 피해자 역시 합의를 잘 해주었고, 나의 의뢰인은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의뢰인은 피해자와 합의를 하게 된 것이 모두 내 덕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의뢰인의 진정어린 뉘우침과 현재의 딱한 처지가 나를 먼저 감동시킨 것이고, 그 방법 외에는 선처방법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피고인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진심어린 문장과 말로 피해자에게 어려운 시도를 해보게 된 것이다. 역시 진정성의 힘은 대단하다.

누구든지 진심을 다해 호소하면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감동받은 상대방은 진심을 다하는 사람의 솔직함과 진정성 때문에 최대한 도와주려고 애쓴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과연 이런 일이 변론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진정어린 열정을 가지고 매번 오디션에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던 연습생이 결국에는 소속사 대표에 감동을 주어 아이돌로 변신하는 과정이나 창고에서 시작된 보잘 것 없는 작은 회사가 열정과 비전으로 큰 투자자를 만나는 과정처럼 진정성은 세계 어느 곳이나 어느 시대나 통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장미애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