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701001060100050541

전 축구국가대표 박지성 선수의 아버지 성종 씨를 처음 본 건 십 수년 전 수원 신(新) 영통의 한 호프집이었다. 당시 박 선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에서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 등 전설들과 함께 전성기를 누리는 대한민국 축구의 심장이자 자존심이었다.

늦은 저녁,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그는 길을 지나다 일행인 후배의 권유로 자리를 함께하게 됐다. 후배가 권한 생 맥주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박 선수에 대한 근황과 이런저런 추억담을 전해줬다. 30분쯤 더 앉았다가 선선히 일어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졌다. 선한 얼굴에 행복이 묻어났다.

당시 박 선수는 비시즌이나 국가대표팀 A매치가 있을 때 귀국했는데, 때마다 김 용서 전(前) 수원시장을 찾거나 안부 전화를 했다고 한다. 박 선수는 김 전 시장을 '아버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한 존경과 친근감을 나타냈고, 김 전 시장도 친아들처럼 아꼈다. 김 전 시장은 기자에게 "축구협회장으로서 어렸을 때(세류초등학교 시절)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인연이 있다"며 "착한 지성이가 대스타가 된 이후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줘 고맙고 기쁘다"고 했다.

박 선수가 축구에만 전념하도록 성종 씨는 궂은일을 마다 하지 않았다. 체격이 작고 왜소한 아들이었다. 어머니 고(故) 장명자 씨 역시 죽을 고생을 했다. 궁핍한 살림에 자영업을 하기도 했다. 박 선수가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에서 뛰게 되자 된장과 고추장, 김치를 퍼 날랐다. 박 선수는 그들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 어머니가 영국 땅에서 교통사고로 지난 12일 운명을 달리했다. 할머니도 같은 날 영면했다. 이런 슬픔이 없을 것이다. 박지성은 유난히 효심이 지극했다. 프로팀에서 처음 받은 계약금 5천만원을 모두 부모에게 보냈고, 용인의 멋진 전원주택에서 살도록 했다.

신은 인간이 행복하도록 놔두지 않는 듯 하다. 짓궂은 아이처럼 돌을 던진다. 불교의 가르침에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이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두 부자(父子)의 한없는 슬픔을 위로한다.

/홍정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