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사부나 김정희가 느낀
그 맛이 어떻다고 말할 순 없지만
가족들과 모여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란 걸 알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만든 요리 함께 먹으면
그땐 맛이 뭔지 말할 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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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언제부턴가 우리 식구 중에서 나만 빼고, 그러니까 아내와 딸, 아들 녀석까지 TV에서 먹는 걸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나오면 넋 놓고 본다. 얼마 전엔 어느 먹방에 유명 요리사 고든 램지가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나는 식구들의 그런 모습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먹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먹는 걸 보고 즐긴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먹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일을 기꺼이 감내하는 출연자들은 더 이상해 보였다. 나라면 밥 먹을 때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을 것만 같아서다.

그러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방송을 보고 즐겼는지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거의 보지 않지만 나도 한 때는 스포츠 경기 중계방송을 즐겨 보았다. 야구나 축구 경기는 무척 즐겨 보는 편이었고 가끔은 권투나 이종 격투기를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주로 보았던 셈이다. 으레 치고 박고 싸우거나 승자의 환호와 패자의 눈물이 있는 그런 일들을 보고 즐겼던 것이다.

반면 먹방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즐거워하며 음식을 나눠먹는 평화로운 모습이 이어질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먹방 보는 식구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걸 이상하게 바라보는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음식남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요리사인 주사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입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스스로 그런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가족들 또한 그의 요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 요리사 온씨가 그의 고충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베토벤이 좋은 소리는 귀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처럼 좋은 입맛도 입에만 있는 것이 아니야."

얼마 후 온씨는 건강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일하던 주방으로 돌아와 숨을 거둔다. 동료를 잃고 슬픔에 잠긴 주인공은 자신의 요리를 먹는 가족들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 결과 그는 가족들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요리가 이미 제 맛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후 그는 평소 마시던 고산차 대신 물을 마신다. 평생 그토록 좋아하던 차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입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주변에서 그가 요리한 음식을 먹으면서 감탄하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손녀 뻘인 이웃집 어린이 산산은 그의 음식을 언제나 맛있게 먹어주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매일 같이 여러 가지 음식을 요리한 다음 그것을 들고 학교로 가서 산산에게 준다. 아이들은 그가 만든 음식에 환호했고 이후 그는 다른 아이들의 음식까지 만들어서 학교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산산이 집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대신 먹던 주인공은 조금씩 깨달아 가기 시작한다. 동료 온씨가 맛은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뜻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딸이 차려준 음식을 먹으며 주인공은 마침내 입맛을 되찾았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찾은 맛은 어떤 맛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추사 김정희도 죽기 두 달 전 이런 대련을 썼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라는 뜻이다. 이 글귀대로라면 가장 맛있는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따위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김정희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그의 나이가 일흔 한 살이었으니 그의 미각 또한 주사부 만큼이나 온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변변한 요리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주사부나 김정희가 느낀 그 맛이 어떠했을지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즐거움이라는 뜻만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만든 요리를 식구들과 함께 먹는 날이 오면, 그 때는 나도 맛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