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준 참여·미군정 고문 추대
불하받은 공장 그룹모체 키워
경남·강원 생사 대부분 인수
1945년 8월 18일 건준 부산지부가 발족되면서 김지태는 건준의 재정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건준의 운영자금으로 10만원을 희사했다. 그가 어떠한 동기로 건준에 참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해방직후 김지태의 정치·사회활동은 건준의 참여로부터 시작됐다.
또한 김지태는 1945년 10월 31일 부산상공회의소의 매니저로 임명됨과 동시에 미군정 재산관리처 부산지역 고문에 추대됐다.
김지태는 1946년 3월에 귀속업체인 욱견직(旭絹織)의 관리인으로 임명됐다.
1937년 경남 동래군에 설립됐으며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주로 군수용 피복류를 가공한 섬유제조업체였다. 김지태가 관리인으로 임명되던 당시 근로자수는 300여명 규모였다.
욱견직 또한 국가에 귀속된 여타 적산업체들처럼 해방과 함께 종업원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식의 자주관리(自主管理)체제로 운영됐으나, 관리미숙에다 노노(勞勞)간의 대립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1946년 3월에 설립된 대한노총이 반공을 기치로 좌익계의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와 대립각을 세움에 따라 전국의 사업장에서 이데올로기 분규가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욱견직도 노노 갈등으로 공장이 폐쇄되면서 생계가 막연했던 종업원들이 스스로 관리인 희망자를 물색했으나 선뜻 나서는 기업가들이 없었다. 전평의 극성스런 자본가 타도 분위기 탓에 적산기업을 맡으려는 자본주들이 나서지 않은 탓이었다.
욱견직의 자치기구 간부들은 전체 종업원 대상의 투표를 통해 다득표자인 김지태에게 회사의 운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지태는 사재 20만원(현 시가로 약 800만원)을 투자해 건물을 보수하고 일본에서 직기를 새로 도입하는 등 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회사의 이름도 조선견직(朝鮮絹織)주식회사로 바꿨는데 1951년 3월에 김지태에 정식으로 불하됐다.
김지태가 관리인으로 임명된 이후 5년만에 조선견직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이 공로를 감안한 것이었다. 8시간 근로와 임금인상, 복지확충 등의 모범적 경영이 생산성 제고로 연결된 결과였다.
김지태는 운영난으로 빈사지경인 경남일대의 제사공장들을 전부 사들여 조선견직에 통합해 제사-견직의 수직계열화로 경쟁력을 제고 하는 등의 창의성도 발휘했다.
밀양의 동양제사, 진해의 고려제사, 진주의 해동제사 등을 몽땅 사들여 1949년 6월에 경남합동제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후일 경남합동제사는 한국생사그룹의 모체인 한국생사로 거듭났다.
김지태는 1946년 9월에는 부산진구 범일동에 대동산업(大同産業)을 설립했다. 경남합동제사가 생산하는 생사의 대부분은 욱견직의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대동산업을 통해 수출되었다. 이후부터 김지태는 국내 실크업계의 왕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동산업은 증가하는 업무량과 수출사업 활성화를 위해 1949년 12월 22일에 본사를 서울 중구 소공동 21번지로 이전하고 상호를 이화상사(二和商事)주식회사로 바꿨으며 경남합동제사도 인수했다.
1951년 3월에 조선견직을 불하하면서 생사의 수출제고 및 조선견직에의 안정공급을 위해 동년 6월에 원주제사(原州製絲)를 설립해서 이화상사 산하에 두었다. 이로써 이화상사는 경남지역의 생사는 물론 강원도에서 생산되는 생사의 대부분도 장악할 수 있었다.
1952년 3월에는 대구의 대한생사(大韓生絲)를 인수했다. 당시 대한생사는 대구와 경북 영주에 각각 제사공장을 거느린 제사메이커로 1919년에 설립된 조선생사(朝鮮生絲)의 후신이었는데, 1951년 9월 관리인 이종완과 구재구에 7억3천만원에 불하됐던 것을 김지태가 인수한 것이다.
김지태는 이화상사의 자본금을 증액하고 상호도 한국수출산업(韓國輸出産業)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조선견직은 생사 생산에서 완제품의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시스템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이화상사도 굴지의 생사무역 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