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사옥 전경
김지태가 언론사업에 진출해 인수한 부산일보 사옥 전경. /'김지태사장 창업35년사' 수록

부산일보 인수 언론사업 진출
민우회 리더 활동 정권 미운털
'조방사건' 연루 불구속 입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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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는 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언론사업에도 진출했다. 진출의 계기는 1946년 4월 부산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된 것이었다. 향토발전을 위하여 부산직할시 승격운동을 벌이면서 향토민 계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언론계는 해방과 함께 일제 앞잡이 매일신보가 폐간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복간됐다. 서울신문, 한성일보, 독립신문, 중외일보, 국제신문, 태양신문, 자유신문, 극우계의 대동신문 등 일간신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좌익계인 인민보와 해방일보가 활개 쳤으나 대부분 경영난에 시달렸다.

김지태는 경쟁이 심한 중앙지 대신 지방신문을 운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부산에는 좌익계인 인민해방보와 대중신문, 극우계인 부산정보와 신한일보 외에 자유민보, 부산매일신문 등이 있었으며 일제의 기관지역할을 해오던 부산일보가 종업원 자주관리로 운영 중이었다.

귀속재산인 부산일보는 박수형이 관리인이 되어 운영했는데 시설은 양호했음에도 재정난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김지태는 1948년 3월에 부산일보를 인수하면서 역시 경영난의 대중신문까지 매입해서 부산일보에 통합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종업원들의 임금 인상과 노후시설 교체는 물론 서울에서 원로언론인 백대진(白大鎭)을 편집국장으로 스카웃하는 등 신문의 품질 제고에 진력해 부산일보의 기초를 닦았다. 김지태는 기업가 활동으로 분주했음에도 하루 한번 씩 부산일보에 들러 제반업무를 챙겼다.

김지태는 정치인으로도 변신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갑구에 입후보한 것이다. 서면이 중심인 부산 갑구는 김지태의 잔뼈가 굵은 고장으로 사업의 근거지이기도 했는데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에서 그 자신도 미국의 정치가들처럼 사업과 정치의 양립을 결심한 것이다.

제헌의회 의장을 역임한 신익희 등 유력 정치인들로부터의 권유도 한몫 거들었다. 부산 갑구에는 총 11명의 후보들이 난립했는데 39세의 장년 김지태는 근소한 표차로 당선됐다.

그러나 2대 국회의 개원식을 치른지 불과 6일만에 6·25전쟁이 발발해 김지태는 피난과 천도, 정치파동 등으로 고난의 시기를 보냈다. 김지태는 이충환, 윤길중, 권중돈 등 소장파 의원 36명을 규합해서 원내교섭단체인 민우회를 조직하고 리더가 되었다.

그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한 몇몇 국회 간부들의 생활비를 거의 도맡아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민우회가 정부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김지태 의원은 이승만정권의 탄압대상 제1호로 지목됐다.

자유당정권에 미운 털이 박혔던 김지태는 당시 국내 최대의 조선방직과 관련한 소위 '조방낙면사건'에 연루돼 조방에 대한 우선 불하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1951년 3월 19일에 불하일자를 앞두고 제반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3월 16일에 당시 조방의 임직원 10명이 이적(利敵)죄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구속된 것이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창용 특무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했고, 죄목은 부당이득 취득을 목적으로 광목에 재생면(再生綿) 5%를 혼합해서 군납 복지(服地)의 품질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재생면을 사용한 광목은 군납용이 아닌 민수용이었을 뿐 아니라 광목에 재생면 5%를 사용하는 것은 방직기술상의 상식이었다. 김지태는 현직 국회의원이어서 불체포특권 때문에 불구속 입건되었으나 나머지 구속된 조방의 간부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강일매(姜一邁)가 1951년 9월 5일에 조방의 관리인에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강일매는 1955년 10월 29일에 조방을 35억환(약 550억원)에 불하받았다. 연고권자에 우선 불하한다는 귀속재산처리법도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