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선상에서 이상화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선수생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평창올림픽.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들. 더욱이 상대는 일본 선수 고다이라 나오. 그만큼 금메달이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정확히 37초33 후. 결승선을 통과하자 빙속의 여제 이상화를 연호하는 관중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들썩였다. 금메달에 0.39초 뒤진 기록이었지만, 최소한 관중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표정관리를 잘하던 이상화지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금메달을 따지 못해 슬픈 것은 아니었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싶었다. '고마웠다'란 말을 가장 듣고 싶다."
빙속의 여제라는 소릴 듣지만 이상화의 선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쇼트트랙 선수로 출발해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타고난 운동신경 때문인지 쉽게 적응했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끈질기게 이상화를 괴롭혔다. 무릎부상에 이어 하지정맥류. 이상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집안 사정상 동생을 위해 선수생활을 포기한 오빠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달려야 했다.
이상화는 10년간 빙속 여제로 세계를 호령했다. 2006 토리노올림픽 때 5위를 했던 그녀는 2010년 스무살의 나이에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더욱이 2014 소치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2연속 금메달을 차지해 '올림픽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 이날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는 눈물을 흘리는 레전드 이상화를 안아주면서 "넌 내가 존경하는 선수"라며 한국어로 "잘했어"라고 말했다. 이 장면에 대해 AP통신은 "역사적인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지만 화합을 보여줬다"고 극찬했고, 일본 언론도 "한일 정상 결전의 마지막은 아름다운 결말이었다"고 타전했다.
이상화는 은퇴의 기로에 서 있는듯 싶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상화에게 "은퇴하지 말라"고 강권할 수 없다. 부상을 안고 뛰는 선수 생활의 고통을 우리 범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퇴 결정은 순전히 그녀의 몫이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빙속의 여제가 어떤 진로를 선택하든 우린 그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