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잘남은 혈통의 잘남이요
재능의 탁월함만 있을뿐이다
잘난자들 못된 짓 드러나는 요즘
할머니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지금 미투(#Metoo)운동도
사람됨의 길 찾는 것 같다

2018022701001931600095531
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다시는 못난 짓 하지마라. 못됐구나. 어릴 때 우리 할머니는 뭔가 잘못한 일을 나무랄 때면 못난 일과 못된 일을 구분해서 말씀하셨고, 아마도 어떤 기준을 가지신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쉽게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못남은 뭐고 못됨은 뭘까. 나중에서야 이 말의 의미와 용법을 점차 깨치게 되었고 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왜 '나쁜 짓'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하여 말하는 대신, 옛날 어른들은 '못된 짓'이라고 하는지.

못남은 타고난 한계를 이른다. 못남의 반대말은 잘남이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못난 사람과 잘난 사람이 있고 못난 사람은 못난 짓을 계속 하며 사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저마다의 잘남과 못남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잘남은 고대 그리스말로 '아레테'라고 한다. 아레테는 '덕성' 혹은 '탁월함'으로 번역되는데, 원래는 전사적 귀족적 탁월함을 뜻하였다. 이런 의미의 잘남이란, 전쟁의 신 아레스를 자기의 혈통 속에 갖지 못한 채 말(馬)도 무장(武裝)도 없이 태어나는 평범한 이들에겐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아테네에 민주정이 수립된 이후, 이 말의 의미는 사람들 각자가 지닌 재능의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레테의 의미를 그렇게 기술과 기능으로 평준화시켜 설명한 사람은 아버지가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산파였으며 가장 친한 친구는 구두장이였던 민중 출신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러면 한 번 타고난 잘남과 못남은 고칠 수 없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히 잘남 중에서도 지적 탁월함이 아닌 품성의 탁월함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읽어보면 잘남을 탁마하는 것보다 못난 짓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 못난 짓을 하지 않으려면 자기의 못남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용기'라는 탁월함에 대해 보자면, 겁이 많은 사람은 좀 더 용기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고, 반대로 겁이 없는 사람은 무모함을 삼가는 두려움을 배워야 한다. 모자람뿐 아니라 넘치는 것도 못난 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자람은 채우고 넘침은 비우는 것이 못난 사람이 되지 않고 못난 짓을 하지 않는 길이다. 그것은 '행위'를 통해 '습관'을 기르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한 사람의 습관은 한 사회의 관습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관되고 사람의 됨됨이는 일생에 걸쳐 만들어져간다. 사람은 그렇게 '되어가는 존재'다. 이 '사람 되어가는 사람'이라는 말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인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똑똑함은 대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됨의 길에는 오직 사람 말고는 설 수 있는 존재가 없다.

그러면 못된 사람은 어떻게 사람 되게 만들 수 있을까.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사람들 각자에게 각자 다른 잘남을 각자 다른 기술을 통해 '다르게' 나누어주었다고 하는데, 함께 사는 기술만은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함께 살라고 우리가 똑같이 나누어 가진 정치적 기술, 그게 정의와 염치다. 염치를 아는 것, 즉 부끄러움에 대한 감각은 자기의 못남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고, 정의에 대한 감각은 못됨을 옳지 않은 일로 분별하는 능력이다. 못된 짓을 그치도록 하는 방법은 모두 함께 그게 못된 짓이라고 분별하여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는 정치공동체 안에서만 수립할 수 있다. 잘남을 칭송하여 본을 삼고 양 극단의 못남을 고쳐나갈 수 있다면 못됨은 못된 짓을 꾸짖음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못된 짓에 대해 그건 못된 짓이라고 모든 사람의 입으로 거듭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 못된 짓을 멈추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날 잘남이란 다시 혈통의 잘남이요 재능의 탁월함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잘남과 사람됨이 계속 어긋난다. 잘난 사람들이 저지른 못된 짓이 세간에 드러나고 있는 요즘, 이 반똑똑이들의 못된 짓에 대하여 할머니라면 뭐라 하셨을까. 그런 못된 일이 없어질 때까지 두고두고 말하라 하지 않았을까. 지금 미투(#Metoo)운동도 함께 사람됨의 길을 찾는 운동이라 생각한다.

/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