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제 양조시장 뛰어들어 호황
1949년 첫 지급인도거래 '대박'
정부융통 힘입어 수입품 다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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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은 1939년 삼성상회의 흑자경영을 통해 발생한 이익금으로 조선양조장을 인수했다.

대구에는 총 8곳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4곳은 일본인 소유이고 나머지 4곳은 한국인 것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청주를 일본 양조업자들만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계 양조장에는 막걸리와 약주 생산만 허용했는데 일본인 소유의 조선양조가 경영진 내분으로 매물로 나온 것이다. 조선양조는 소주, 탁주, 청주(월계관) 등 연간 생산능력 7천석으로 대구 최대의 양조장이었다.

그는 조선양조를 10만원에 인수했는데 당시 양조업이 허가제임을 감안할 때 헐값에 사들인 것이다. 이병철은 인수 1년 만에 생산능력 1만석으로 사세를 키웠다.

중일전쟁이 점차 확대돼 전반적으로 경기가 침체했음에도 양조업은 호황을 누렸다. 특별한 판매전략 없이도 주어진 할당량만 생산하면 저절로 팔려 나갔다. 삼성상회 설립 후 최초의 사업 다각화였다.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흑자에 힘입은 이병철은 사업지를 서울로 옮겨 1948년 11월 종로2가 부근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조홍제(1906~1984, 효성그룹 창업자)를 부사장으로 영입해 무역업을 개시했다.

경남 함안 출신의 조 부사장은 이병철보다 4세 연상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서울의 중동학교 초등과와 협성실업학교를 수료하고, 19세 때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인 1926년 6·10만세 사건에 연루돼 퇴학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호세이대 경제학부에 진학해 1935년에 졸업했다. 귀국 후 1942년에 군북산업조합을 인수, 군북산업(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정미소를 운영하다 1947년에 상경,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과 함께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삼성 측에선 조 부사장이 삼성물산공사의 전무이사로 근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처음부터 자주무역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 국내 무역은 중국 상인들이 홍콩과 마카오에서 무역품을 배로 실어와 인천과 부산 등지에서 국내 상인들과 물물교환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소극적 무역방식은 가격조건 불리 및 수입물자의 적기조달 곤란, 수입상품의 선택제한 등 문제가 많았다. 차제에 국내 무역업체들은 해외로 가서 직접 상품을 구입하는 자주무역방식으로 전환하던 중이었다. 1949년 11월 조 부사장이 마른오징어 3만근을 배에 싣고 부산을 출발해 8일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조 부사장은 국내 굴지의 무역상들과 거래하던 홍콩의 찬넬양행을 찾았으나 현지 오징어시세가 너무 낮아 교포 무역상인 이창복에게 판매를 위탁하는 한편 찬넬양행에 위탁한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 50곤(梱)을 외상매입해 귀국했다. 국내 무역업사상 최초로 성립된 D/P(Document against Payment base, 지급인도조건) 거래였다.

당시 국내에는 무역전문가 부족으로 다수 무역업체가 어려움을 겪었는데 조 부사장은 삼성 직원들 간에 '무역백과사전'으로 불릴 정도로 보배였다.

삼성물산은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 오징어와 한천 등 수산물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했는데 수입품은 국내에서 수입가액의 10배 정도로 거래됐다. 1945년 8.15 해방에 따른 생산 차질로 국민들은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홍콩무역으로 자신을 얻은 삼성물산은 이후 철판 등의 시설재와 재봉틀, 실, 바늘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물품을 수입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일체의 사업을 접어야 했고 이병철은 빈손으로 서울을 떠나야했다.

이병철은 1950년 12월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란 간판을 걸고 사업을 재개했다.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이 초래한 물자부족문제를 손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무역업이었다.

수입물품 대금결제용 달러화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정부가 무역업자들에 할당해 주는 달러화 액수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역업자들은 대안으로 시중의 암달러를 고가로 매입하는 한편 외화벌이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수출했다. 또한 이 무렵엔 밀수가 기승을 부렸는데 한국에서 일본에 밀수출한 고철 더미 속에서 대포, 탱크, 소형선박 등 멀쩡한 군수품들까지 확인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삼성은 국내에서 고철 등을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고 대신 홍콩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삼성이 수입한 설탕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이양구(1916~1989, 동양그룹 창업자)에게 넘겼다.

함경도 함흥 출신의 이양구는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월남해서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서 밀가루와 설탕 등 식품유통에 뛰어들어 굴지의 대상인으로 성장했는데 당시 이양구는 삼성에서 수입한 설탕의 국내 시판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삼성은 무역업을 통해 획득한 이익금과 정부자금을 융통해서 수입물량 확대 내지는 수입품목 다변화에 전념했다. 1950년 6월 24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선 수입품의 선적서류를 담보로 수입자금을 연리 5.4~5.1%로 융통해주었다.

민생안정을 목적으로 생산재 수입업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마련됐는데 특히 이 자금은 이자율이 매우 낮아 자금을 융통받는 것 자체가 특혜였다. 삼성의 외화대부 한도액도 종래 3만 달러에서 점차 10만 달러로 확대됐다.

삼성은 소비재 수입에 치중해서 국내 무역업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