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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 리트비넨코. 2차 체첸전쟁을 촉발시킨 모스크바 건물 폭탄 테러가 러시아 정부 내부의 불만과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KGB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2000년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FSB(KGB의 후신) 요원. 내부고발자인 셈이다. 그가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한 것은 2006년 11월 '폴로늄 210'이라는 방사성 독극물에 의해 사망하면서다. 이 물질이 섞인 차를 마신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3주 만에 숨졌다. 죽기 직전 머리털이 모두 빠진 채 앙상한 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공개돼 세계인에게 충격을 던졌다. 사인을 10년간 조사해 온 영국 정부는 러시아를 배후로 생각했지만, 심증만 있을 뿐 증거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리트비넨코의 절친 안드레이 네크라소브 감독은 2007년 그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리벨리온(rebellion)'을 만들었다. 생전의 리트비넨코 인터뷰를 중심으로 가족과 주변 인물 등의 증언을 담았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리트비넨코를 독살했다고 주장하는 킬러와의 인터뷰도 삽입했다. 그래도 러시아는 꿈쩍도 안했다.

독극물로 인한 암살은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자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78년 영국 런던에 망명 중인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 게오르기 마르코프 사건. 그는 출근 버스를 기다리던 중 우산 끝에 찔린 뒤 나흘 만에 사망했다. 부검에서 KGB가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리친'이란 독성물질이 발견됐으나 그뿐,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지난해 2월 북한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맹독성 신경작용제인 VX로 살해당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한 이중 스파이의 독살을 두고 심각한 외교분쟁을 겪고 있다. 지난 4일 영국의 솔즈베리 한 쇼핑센터 벤치에서 전 러시아군 정보총국(GRU) 대령 출신인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 스크리팔이 맹독성 신경가스로 독살됐다. 영국정부는 러시아의 소행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메이 총리는 경찰 수사를 통해 범행의 배후가 확인될 때까지는 이번 사태를 러시아의 소행으로 단정 짓는 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러시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