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예술로 승화 '한국 마티스'
이상의 둘도 없는 지기이자 후원자
구인회 동인지, 청색지 창간 기여
일제 말 '소카이'로 수원이주 활동
나혜석 등과 함께 서울과 긴밀소통
근대서양화가로 미술·문화사 족적

조성면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강추위가 기승이더니 어느새 완연한 봄이다. 온종일 봄소식을 찾아 헤매다 고개를 들어보니 매화나무 가지에 이미 봄이 와있더라는 송나라 시인 대익(戴益)의 탐춘시(探春詩)가 생각난다. 한국미술사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서산 구본웅(具本雄, 1901~1953)도 우리 곁에 훨씬 가까이에 서 있는 작가다.

구본웅은 한국의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에 비유되는 근대 서양화가로 한국의 미술사와 문화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구본웅의 화풍은 로트레크보다는 오히려 블라맹크, 조르주 루오, 앙리 마티스, 사토미 가츠조 같은 야수파 화가에 가깝다. 어린 시절에 당한 사고로 장애를 입고 성장이 멈추었다는 신체적 특징 외에 구본웅과 로트레크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신체적 특성과 장애를 강조하는 한국의 로트레크라는 못마땅한 비유를 걷어내고 그에게 '한국의 마티스'라는 새 이름을 헌정하고 싶다.

서산 구본웅은 장애를 예술로 승화해낸 삶의 승리자였다. 작가 이상(1910~1937)의 둘도 없는 지기로서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그를 후원하였으며, 한국모더니즘문학의 요람인 구인회의 동인지를 만들었고, 또 종합문예지 '청색지'를 창간하여 한국문화발전에 기여한 문화예술인이었다. 문예지 '문학사상'의 창간호(1972. 10.) 표지그림으로 사용되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상의 초상화 '우인상(友人像)'이 바로 서산의 작품이다.

그 서산이 수원과 기흥을 오가며 살았다.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46-1번지 곧 수원문화재단 전통문화관의 예절교육관 자리가 그의 옛집이다. 최근 토지대장을 입수하여 열람해보니 1941년 그의 부친 구자혁이 토지와 주택을 매입,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택과 대지는 1959년까지 구본웅의 장남인 구환모 선생이 소유하고 있었다. 서산이 수원으로 이주해온 것은 일제 말기 미군의 폭격을 피해 내려온 소개정책 곧 '소카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산과 수원의 인연은 이보다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간다. 경신고보에 입학하여 YMCA 청년회관에 신설되어 있었던 '고려화회'를 다니면서 이종우, 고희동, 나혜석 등 한국미술사의 선구자들에게 서양화의 기초를 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구광모 교수의 논픽션 '우인상과 여인상―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에 서산 구본웅과 정월 나혜석의 만남이 잘 그려져 있다.

서산의 차남 구승모 선생과 신풍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유동준 나혜석 기념사업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수원집 사랑방에 야수파 계열의 그의 작품이 방안에 한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귀중한 작품들은 한국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었으나 서산 구본웅과 이상과 정월 나혜석을 통해 문학과 미술이, 수원과 서울이 서로 긴밀하게 소통했던 아름다운 이야기만큼은 꼭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결코 가볍지 않을 이 문화사적 사실들이 다시 묻혀버리지 않고 한국문화와 수원의 지역문화예술을 활성화하는 계기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