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복 염색해 양복 짓던 시절
이승만과 부친 '인연' 친분 나눠
정부, 소모방공업 아낌없는 지원
모직업의 경우 일제시대의 구식기계를 수리한 것이 고작인데 다 거의 수공업 수준이었다. 품질 또한 말이 모직물이지 군용모포나 다름없을 정도로 더욱 형편없었다.
당시 국내에는 미군 진주와 모직제품에 대한 인기가 상당해 밀수가 성행했다. 최고의 명품으로 치부되던 수입산 '마카오복지'는 양복 한 벌 가격이 웬만한 월급쟁이의 봉급 3개월 치에 달할 정도여서 대용품으로 미군복을 염색, 재가공한 양복이 인기였다.
이병철은 강성태 상공부장관으로부터 "국내적으로 모방은 불모지로 모직공장은 국가적으로 시급하다. 정부가 적극 후원하겠다"('호암자전' 73면)는 답변을 얻어냈다.
당시 자유당정부는 제당, 제분, 방직, 시멘트, 비료, 판유리 등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정하고 참여업체들에 한해 정부 보유 달러화 및 원자재 우선 배정, 해외의 설비공급선 및 차관 알선, 장기저리의 거액 융자 및 세금 감면 등의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기업가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여서 경쟁적으로 정부에 접근했다.
이병철과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도 주목된다. 이병철의 부친 이찬우(李纘雨, 1874~1957)는 청년시절 서울에서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등을 출입하며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과 이찬우는 동갑이었다. 이병철은 1946년에 이승만을 대구에서 처음 만났다.
민족지도자로 부상한 이승만이 '10월 폭동' 진압 직후에 대구를 방문했을 때 대구지방의 유력자 30여명이 환영위원회를 꾸려 그를 영접했는데 이병철은 조선양조장 대표로 환영단에 끼었다.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유력한 정치지도자이기도 했으니 기업가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인물인 것이다.
얼마 후 이병철은 대구신탁은행 중역이던 오위영과 함께 서울의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이병철은 사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미의 '사업보국'관을 굳혔다고 언급했다.
1954년 9월 15일에 자본금 1억환의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대구 침산동 105 23만1천㎡(약 7만평)를 공장 부지로 확보했다. 산업은행에서 대충자금(무상 원조물자를 정부가 국내에서 매각해 확보한 자금) 5천830만환을 융자받아 일관기계설비(총 1만추)를 정부권고로 서독 스핀바우(Spinbau)사에 발주했다.
당시 정부는 낙후된 국내 모직공업을 진작시킬 목적으로 최신설비의 정부직영 모직공장을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스핀바우사에 모방 5천주를 발주해 둔 상태였는데 이병철이 제일모직을 설립하자 정부가 스핀바우사를 추천했던 것이다.
이병철은 1955년 1월 4일부터 소모(梳毛), 모방, 직포, 염색, 가공 등의 일관 공장 건설을 서둘러 1년여 만인 1956년 3월 15일에 완공했다. 1956년 5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는데 원료인 울탑(wool top)은 영국과 호주에서 수입하고, 자금은 주로 정부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자금을 사용했다.
생산 첫해에는 소모사(털실) 46만7천파운드, 방모사 3만6천파운드, 복지 8만8천 야드 등을 생산했다. 그러나 품질이 열악해 소비자들이 외면한 탓에 생산을 거듭할수록 적자가 누적됐다.
정부는 소모방공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는 무리수를 둬가며 제일모직에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1958년에는 소모사를 제외한 모직물 전반에 대한 수입을 금지했다.
이후 제일모직의 경영상태가 점차 개선돼 1960년에는 자본금을 30억원으로 증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제일모직 또한 제일제당과 마찬가지로 불모지인 이 땅에 '공업입국'의 가능성을 확인해주었다. 제일모직 설립 2년 만에 이병철은 거부(巨富)의 반열에 올랐다.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였다.
그 결과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제일제당과 함께 트로이카체제를 구축했다. 정부의 극단적인 공업보호정책의 산물이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 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