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고립된 제주 공동체문화는
해방 맞아서도 다른 사람에겐
여전히 낯설게만 남아 있었다
4·3 일어나기전 美군정·경찰은
도민 60~90%가 좌파라고 예단

월요논단 홍기돈2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올해는 제주에서 4·3이 일어난 지 70주년 되는 해다. 이를 맞아 동백꽃 배지가 제작되었고, 배지 달기를 독려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4·3과 동백 이미지가 결합하게 된 계기는 강요배의 연작그림 '동백꽃지다'라 할 수 있다. 동백은 질 때 한순간 통으로 툭 떨어지는데, 제주 출신 화가는 4·3 당시 국가폭력에 의해 양민들이 살육 당하는 현장을 한순간 명줄이 툭 끊기고 마는 이미지로 해석해 내었던 것이다.

동백을 항쟁과 연관 짓는 제주 민중의 상상력에는 나름의 역사가 있다. 제주에서 동백은 '장두꽃'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네들은 아마 지는 동백을 바라보면서 장두의 머리가 베이는 장면을 되새겼으리라. 흔히 장두(狀頭)는 장수(將帥)로 오해되지만, 실은 소장(訴狀)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장두 출현은 중앙정부가 제주를 내부 식민지로 운영했던 정책과 관련된다.

몇 가지 굵직한 사건만 보자. 말 산업으로 번창했던 제주 경제는 조선 태종·세종 대에 이르러 파탄을 맞이하고 만다. 말을 국가의 통제 대상으로 묶어 사사로운 매매를 금지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부박한 토질 탓에 제주에서는 농사로써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렵다. 호구책을 잃게 된 제주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섬 밖으로 탈출하였는바,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근해를 떠도는 배 위의 유민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중앙정부로서는 제주 유민을 막아야 했다. 유민들은 수적(水賊)으로 돌변하기 일쑤였을 뿐만 아니라, 유민 발생에 따라 제주 특산물의 진상이라든가 말의 안정적인 생산·공급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조 7년(1629)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 내려졌고, 이는 순조 23년(1823) 해제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가지는 의미는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명료하게 드러났다. 남쪽에 '식민지' 탐라(제주)를 거느리고 있으니 '제국'으로서 대한이 성립한다는 논리가 주창된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채 척박한 자연환경과 맞서면서 무거운 진상·부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제주인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장두였다. 간난한 생활에 경래관(京來官)의 가렴주구가 겹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제주 민중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중앙정부에 처지를 호소할 방식이 민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민란이 성공하여 제주읍성을 함락하면 경래관은 섬 밖으로 추방당했고, 이들의 소장은 비로소 중앙정부에 전달되었다.

민중들의 분노가 아무리 극에 달했어도 경래관을 처형하지 못한 까닭은 중앙정부의 응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경래관을 처형한 순간 역모(逆謀)로 내몰릴 우려가 있지 않았겠는가. 이에 왕은 소장의 요구안을 수용하여 민심을 다독이는 한편, 왕의 대리자와 맞선 책임을 물어 장두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그러니까 장두는 민란 이후 난민의 안위를 지켜내는 한편 중앙정부의 분노를 무마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민란을 성공으로 이끌고도 효수될 수밖에 없었던 강제검, 이재수는 장두의 운명을 대표하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배제되고 고립된 조건에서 형성된 제주의 공동체문화는 해방을 맞고도 타자(他者)에게 여전히 낯설게만 남아 있었다. 예컨대 4·3이 발발하기 이전 미 군정과 경찰은 그 이질감을 넘어서지 못한 채 각각 도민의 60~80%, 90%가 좌파라고 예단해 버렸다. 4·3 소재 최초의 소설 '비바리'(문예, 1950.2)의 작가 허윤석 또한 마찬가지다. 무장대를 이끄는 고·양·부 세 성씨의 지도자가 삼성혈에 모여 제사를 지낸 뒤 "계집은 남을 주어도 삼성혈을 더럽혀선 안 된다"고 결의하는 것으로 4·3을 그려내는데, 이는 제주문화를 신화시대 혈족의 연대 수준에서 파악한 소산이기 때문이다.

4·3이 일어난 지 70주년을 맞는 이즈음, 우리 사회의 4·3 이해는 어느 만큼이나 성숙해졌을까. 동백꽃 피고 지는 일이야 자연의 조화이지만,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달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사람의 소관이다. 릴레이 캠페인의 "제주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 라는 구호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