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자동차 그리고 집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었으면 좋겠네"라던 윌리는
'자동차 할부 끝나니 폐차 직전'인
삶의 사이클에서 못 벗어났다.


전문가 권순대2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올해 독일 하이델베르크 페스티벌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다. 오는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무대에 올리게 된 연극 3편에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포함되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되는 작품이다. 성북동비둘기의 이번 공연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은 런닝타임 내내 트레드밀 위에서 달린다고 한다. 트레드밀 위에서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윌리 로먼은 우리 사회의 보통사람과 닮아 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대공황 이후 20년이 지난 미국 사회의 이야기이고, 성북동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IMF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다.

윌리가 트레드밀 위에서 달려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의 보통사람이 집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를 신한은행 '2018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가 잘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 거주자는 전국 평균 7.3년이 걸려야 집을 구입할 수 있다. 현재 거주 중인 전세 보증금에 생활비를 제외한 자금을 모두 모았을 때 이야기다. 서울에서는 20.7년이 걸리고 서울 강남에서는 26.5년이 걸린다. 웰세 거주자는 전국 평균 18.4년이 걸린다. 서울에서는 40.1년이 걸리고 서울 강남에서는 49.3년이 걸린다. 그런데 향후 집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54.1%에 이른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아파트 공화국'에서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국의 아파트 열풍에 대해 말한 지 10년이 지났으나 그 사이 정책과 제도, 그리고 주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달려야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을 뿐이다.

'클라이맥스를 산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아파트 공화국' 출간보다 조금 앞 선 시기의 한 아파트 광고였다. 메시지는 그럴 듯해 보인다. '이 아파트를 사세요.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살게 될 거예요'. 정도로 들린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살게 된다는 메시지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광고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다. 사달이 난 사연이 조금은 짐작된다. 클라이맥스는 연극에서 절정을 가리키는데 이게 문제였을 것이다. 한 편의 연극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클라이맥스는 긴장도가 가장 높은 정점의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클라이맥스는 결말 바로 앞에 위치하여 '마지막 바로 직전'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아무리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산다고 한들 그곳이 마지막 바로 직전이라면 누가 구입을 원하겠는가.

윌리는 25년이 걸렸다. 대공황이 있기 전 30대 중반에 구입해서 이제 예순을 넘긴 나이에 이르렀다. 25년을 내리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아내 린다가 말한다.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라고. 그러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린다가 말하는 오늘은 윌리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는 린다가 반복해서 말한 마지막 네 번의 단어는 '해방'(free)이다. 빚진 것이 없는 해방의 날을 그는 그렇게 맞이하였다. 이제 윌리는 더 달리지 않아도 된다.

윌리에게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고 싶어도 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늘 할부금이었다. 냉장고, 자동차, 그리고 집.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으로 가져 봤으면 좋겠네!"라던 윌리는 "자동차 할부가 끝나니 폐차 직전"인 삶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오래 달린 주택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트레드밀 위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내려오지 못했다. 그 위에 한 번 올라서게 되면 좀처럼 내려설 수 없게 된다. 트레드밀의 속도와 다른 삶의 속도를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우리 시대의 윌리는 지금도 트레드밀을 달리고 있다. 클라이맥스를 달리고 있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