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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산337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전경모습. /강효선기자 khs77@kyeongin.com

시인이 직접 가꿔 삶의 추억 고스란히
쉽게 읽히는 그의 시처럼 정겹고 소박
옥상서 詩心 길러준 이동저수지 한눈
바로옆 은퇴후 살던 고향집 '청와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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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조병화 문학관을 가는 길은 특별할 것이 없다.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과 밭, 눈에 익숙한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조병화 문학마을'을 알리는, 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마을 입구에 서 있었지만, 보이는 모든 풍경이 낯익은 것들 뿐이다. 그리고 여느 가정집과 다를 바 없이 '조병화 문학관'이 마을 안에 소담하게 자리했다.

특별할 것 없는 외형과 달리, 조병화 문학관이 가진 특별함은 다른 곳에 있다. 조병화 시인이 직접 문학관을 가꿨고 그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있다.

글을 쓰든, 여행을 가든,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는 것이 없었다는 그는 인생의 추억이 담긴 모든 것을 문학관에 전시했다. 여행을 다니며 모았던 부엉이 조각들, 개구리 소리가 잘 들리던 고향집을 생각하며 수집한 개구리 모형, 럭비선수로 활동했을 때 입었던 옷들까지.

조병화 시인은 삶 속에서 영감을 받았던 사물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비록 색이 바래고 낡은 구석도 있지만, 그 손때가 오히려 정겹고 시인을 추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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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산337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전경 내부 모습. /강효선기자 khs77@kyeongin.com

1층 전시실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시와 직접 그린 그림들이 함께 전시됐다. 그는 다작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3천500여 수의 시를 지었고 시집을 53권이나 냈다.

여행을 다녀와서 낸 산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학번역서들은 110여 권에 달한다. 그의 시는 참 쉽다. 추상이 난무하는 예술계에서 그는 꾸준히 일상의 언어로 누구나 이해하는 시를 노래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어머니가 그립고, 일상이 소중하고, 고향이 그립다. 시가 좋아서 시를 썼던 천생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성실함이다.

시인의 인생 사진이 곳곳에 걸린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가면, 편운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사진이 걸린 교육실과 함께 2개의 작은 방이 나온다. 그 방 한 곳에는 김동리, 서정주, 최병찬, 장욱진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걸렸다. 대부분 시인이 선물받은 것이다.

또 다른 방은 '가족'을 위한 방이다. 시인이 직접 손자, 손녀, 아들, 며느리 등을 그린 소묘 작품과 가족 사진, 편지 등이 전시됐다. 시인이 얼마나 다정다감한지 보고 있자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2층엔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너른 옥상도 있다.

문학관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덕에 옥상에 서면 마을의 전경과 이동저수지가 한눈에 보인다. 시인은 어린 시절 이동저수지를 지나 한참을 걸어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의 시에 유독 '호수'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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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흉상

또 시인이 은퇴 후에 고향으로 내려와 살았다는 집이 문학관 바로 옆에 있는데, 이름이 '청와헌'인 것도 이동저수지와 주변 논에서 '와와'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많이 들려서다. 청와헌 뒷 집인 하얀색의 단층집도 그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인과 형제들이 모여 주변의 작은 돌을 하나 둘 모아 기초를 쌓고 지은 집인데, 이름을 '편운재'라 지었다. 집을 짓다 문득 올려다 본 파란 하늘 속에 구름 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풍경을 보고 지은 것이다.

'살은 죽으면 썩는다/ 어머니 말씀'은 시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시인이 늘 마음 속에 품었던 말이다.

본인의 호를 '편운'이라고 한 것도 한 조각 구름 같은 인생을 빗댄 것 일테다. 그의 시가 우리 마음 속에 와 닿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