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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과의 운명적인 사랑과 예기치 않은 납북, 그리고 다시 망명해 돌아오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최은희는 1950년대~197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영화계의 큰 별이었다.
고인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이날 "어머니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 가족들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건강이 악화 돼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오며 버텨오던 중이었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해 연극 무대를 누비다가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라 김지미·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고인은 1954년 신 감독과 '세기의 결혼'으로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결혼 후에는 신 감독과 함께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연이어 작품들을 쏟아내며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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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인은 신 감독과 이혼한 후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돼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에사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 고인 부부는 1999년 귀국하는데 성공한다. 고인은 이후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이 세상을 떠난 후 건강이 악화된 고인은 허리 수술과 신장투석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19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