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겪었던 청와대 '유사시' 매뉴얼 점검
트럼프와 김정은 '막말'에 전쟁 위협까지…
美특사, 북 비밀 방문·北, 핵시험 중지 결정
몇달 새 변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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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기 정치부장
북미 관계가 일촉즉발로 치닫던 지난해 말 어느 날이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로 춘추관에서 다른 기자들과 함께 춘추관장이 오전 9시께 매일 진행하는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춘추관장은 이날 브리핑 끝에 오늘 청와대에서 특별한 훈련을 하니 참조만 하라고 했다. 청와대는 '유사시'를 대비해 매뉴얼을 마련해 놓고 있는데, 이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한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당시의 급박한 분위기와 맞물려 직감적으로 '유사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한 기자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춘추관장은 답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매뉴얼에 따라 여러분들은 종군기자로 참여하게 된다".

'종·군·기·자.....'. 가슴이 먹먹해지는 네 글자였다. 지난 1953년 맺어진 정전 협정이 65년간 지속돼 온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 '유사시'가 현실화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 북한이 휴전선 근처에 배치해 놓은 1천500문 이상의 장사정포가 불을 뿜으면 2~3분 내에 서울 광화문과 수원 부근까지 포탄이 떨어진다는 사실. 장사정포 범위 안에 2천만여명의 인구가 몰려 있다는 사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부정 속에 사재기 같은 흔들림 없이 일상을 영위하는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 외신기자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의아한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강타했다.

이 모든 게 그리 멀지 않은 엊그제 일이었다. 되돌아 보면 지난해 9월 유엔총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로켓맨'이라고 조롱하며 "북한을 완전 파괴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북한은 '화성 12형'·'화성 15형' 등을 연달아 쏘아대며 한국·일본·괌·미 본토까지 모두 타격권에 넣을 수 있는 미사일 종합세트를 확보했다고 선전했고, 이른바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미 전략폭격기 B-1B가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이륙해 한반도 상공에서 우리 공군과 함께 가상 무장투하 훈련을 실시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몇 주 후 한반도 비핵화 논의를 위해 김정은을 만날 것이다. 북한과 세계를 위한 엄청난 일이 될 것"이라면서 "북미정상회담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도록 뭐든지 하겠다"고 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으로 평가받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후보자는 북한을 비밀리에 전격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 주재하에 지난 20일 개최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중지할 것"이라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결정서에서는 또 "핵 시험 중지를 투명성 있게 담보하기 위하여 공화국 북부 핵시험장을 폐기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한반도의 운명이 몇 개월 사이에 이렇게 흘러 왔다. 미국의 군사적 옵션이 부상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짙게 깔렸다가 항구적인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누구도 쉽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어졌고 또 다른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분명해 보이는 건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유사시'를 끝장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북은 물론 이어질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될 경우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김순기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