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재능 가진 사람에 질투보다
가장 귀한 존재에게 주어지는
'사랑=슬픔' 힘이란 지혜 찾으면서
섭리·운명 속뜻 헤아려야 한다
이것이 불행 초월한 존재론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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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30여 년 전에 개봉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를 질투했던 한 궁정음악가의 생애를 다루어 우리에게 깊은 기억을 안겨준 바 있다. 빈 왕실의 궁정음악가 살리에리는 천재 작곡가로 소문이 난 모차르트의 연주를 듣고 나서 그가 천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하지만 그 천재는 참으로 오만방자했고 여성들을 희롱하거나 비속어를 남발하는 등 한마디로 미성숙한 철부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철부지가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가졌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살리에리는, 정작 자신에게는 그러한 재능을 주지 않은 신(神)에 대한 항의와 절망으로 모차르트에 대한 한없는 적대감을 키워간다. 그 결과 살리에리가 의도적으로 모차르트를 파멸시켜간다는 것이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이때 살리에리가 외친 "신이시여, 주께선 제게 갈망만 주시고 절 벙어리로 만드셨으니, 말씀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음악으로 찬미하길 원하지 않으신다면 왜 그런 갈망은 심어주셨습니까. 갈망을 심으시곤 왜 재능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마지막 대사는, 자신의 재능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적 외침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을 게다. 재능에 대한 감별력은 주었지만 정작 그것을 펼칠 능력은 주지 않은 신의 처사에 대한 항변은, 그것이 섭리이든 운명이든 예술가가 견지하는 욕망과 재능 사이의 관계와 함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천분의 불가항력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해준다.

이와 함께 떠오르는 소설이 최인훈의 단편 '라울전(傳)'이다. 최인훈은 '광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본격적인 분단소설의 출발을 알린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이다. '광장'에서 작가는 북쪽 사회가 가지는 폐쇄성과 집단의식의 강제성을 비판하고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자유방임에 가까운 개인주의를 고발하였다. 그런 최인훈이 '광장' 한 해 전인 1959년에 발표한 소설이 '라울전'이다. 주인공인 라울과 사울은 석학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여 랍비가 된 동급생 친구이다. 라울이 학구파이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사울은 성깔 있는 한량에 가까운 편이었다. 라울은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그가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어보지만, 사울은 바로 예수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부활한 예수는 라울이 아니라 사울을 찾아가 그를 회심시킴으로써 사도로 삼는다. 이때 라울은 "신은, 왜 골라서, 사울 같은 불성실한 그리고 전혀 엉뚱한 자에게 나타났느냐? 이 물음을 뒤집어 놓으면, 신은 왜 나에게, 주를 스스로의 힘으로 적어도 절반은 인식했던! 나에게, 나타나지를 아니하였는가?"라는 말로 항변한다. 이는 그대로 궁정예술사 살리에리의 외침을 닮았다. 이때 사울은 성경의 비유를 들어 "옹기가 옹기장이더러 나는 왜 이렇게 못나게 빚었느냐고 불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옹기장이는 자기가 좋아서 못생긴 옹기도 만들고 잘생긴 옹기도 빚는 것이니"라고 일갈함으로써 신의 의지에 따른 섭리의 전권을 다시금 설파하게 된다.

이 두 편의 예술적, 종교적 서사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같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살리에리와 라울의 운명과 항의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고뇌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섭리와 운명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상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백석 시편 '흰 바람벽이 있어'의 마지막 구절은 매우 융융한 시사를 던져준다. 백석은 이 아름다운 작품에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섭리이든 운명이든 가장 귀한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이 '사랑=슬픔'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재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과 슬픔'의 생성적 지혜를 발견하면서, 섭리나 운명의 속뜻을 헤아려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살리에리와 라울의 불행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발견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