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회장 "첨단기술 미래담보"
1983년 美·日이어 '반도체' 진출
부설硏 설립 붐… 현지법인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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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삼성의 양적 성장활동은 현격히 둔화되는데 이는 내부요인보다 외부요인에 의한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1960, 70년대의 한국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고도성장기였다. 그 와중에 삼성을 비롯한 30대 재벌의 성장이 두드러지는 등 일본식의 압축공업화전략의 성과가 가시화됐다.

즉 극소수 대기업중심의 재벌자본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정부는 재벌들의 확장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재벌들이 다른 회사 주식을 취득할 때 한도를 자기자본의 100% 이내로 제한했다. 재벌들의 몸집 불리기 수단으로 사용됐던 계열사 간 상호출자도 금지됐다.

또한 1987년부터 30대 재벌에 대해선 대출을 동결하는 등 여신규제도 병행했다.

그 결과 재벌들은 과거와 같은 활발한 다각화 작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삼성은 종래와 같은 계열사 수 늘리기를 통한 다각화 정책을 지양하는 대신 기존 계열사들의 사업아이템을 늘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1980년대에도 삼성의 약진은 계속됐으나 콩글로머리트형의 외형 불리기였다. 이 무렵 삼성 계열사들의 매출액, 자본금 규모, 종업원 수 등의 급증으로 방증된다.

한편 이 시기 삼성의 계열사 수 확대작업은 계속됐는데 1981년 한국안전시스템(현 에스원)을 인수했다. 에스원은 종래 삼성그룹의 주요 시설 경비용역을 전담한 중소업체였으나 삼성그룹에 편입된 후 급성장했다.

프로야구시대가 개막되면서 1982년 삼성라이온즈를 설립했다. 삼성그룹 홍보를 높일 목적이었다. 1983년 6월에는 삼성시계를 설립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의 시너지효과로 파생된 업종이었다.

같은 해 6월 30일에는 국영인 조선호텔을 인수했고 1983년에는 삼성반도체의 미국 현지법인 TRISTAR를 설립했다.

1980년대는 삼성그룹이 글로벌스타 기업으로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준비를 하는 시기였다.

이병철은 1983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위험부담이 큰 최첨단의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반도체의 경우 부가가치가 큰 차세대 먹거리지만 막대한 설비투자에 비해 기술혁신 주기가 극히 짧았다.

이병철은 위험을 극복하고 성공을 쟁취해야 삼성의 미래가 담보된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본 길전(吉田茂) 수상 밑에서 일본의 경제기획정책을 담당하던 도엽(稻葉) 박사의 아이디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향후 일본의 살길은 경박단소(輕薄短小)의 하이테크산업에 달려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병철은 한국도 일본과 같은 자원 빈국으로 첨단기술산업 중심으로 산업개편을 서둘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1982년 12월 27일 한국전자통신을 흡수해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고 1984년 5월 수원의 기흥VLSI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최초임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의 반도체 생산공장이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1938년 삼성상회 창립 이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수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으나 반도체사업 진출 결정에 가장 고심했다고 술회했다.

1984년에는 제일제당이 미국의 유진테크와 합작해 유전공학연구기업인 ETI를, 4월에는 삼성의료기기를, 9월에는 세계적인 컴퓨터메이커인 미국 휴렛팩커트와 합작해 삼성 휴렛팩커드를 설립했다.

1985년에는 삼성항공(한화테크윈)의 자회사로 미국에 삼성유나이티드항공을 설립했는데 미국 공군의 전투기 엔진 창 정비 사업을 전담하는 업체였다.

그해 5월에는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설립했고 7월에는 제일제당이 서울 구로동 636 철길 옆에 있는 국내 최대의 건빵 제조업체 동립산업을 인수했다.

일제시대 건빵 공장에서 근무했던 함창희는 대구에서 원조물자인 미국산 밀가루로 건빵을 만들다 서울 수복과 함께 영등포에 있는 적산기업 모리나가 제과를 불하받아 건빵과 설탕 등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동립산업은 1950년대 후반에는 전군에 군용 건빵을 독점 납품하다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등이 드러나면서 몰락, 1962년에 국유화했었다.

1980년대 삼성의 다각화와 관련한 또 다른 특징은 주요 계열사별로 부설 연구소의 설립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1980년 4월 17일 삼성전자 부설 전자종합연구소의 설립 이래 1980년대 내내 계열사별로 연구소 설립 붐이 조성됐다. 1982~1986년까지 총 4천600여억원을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특히 1986년의 기술개발투자비 2천200억원(시설투자 1천631억원)은 삼성의 제조회사들이 같은 해에 올린 매출액의 4%에 해당했는데 이는 국제 제조업체 평균치인 1.9%를 상회하는 것이다.

투자 이유는 첫째 정부의 기술개발정책 때문이었다. 정부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경제 관련 부처마다 산하에 다수의 연구소를 설립하는 한편 민간 기업들에도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종용했다.

둘째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 국내 기업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미래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이 주력하고 있던 반도체, 신소재, 메카트로닉스, 유전공학, 우주항공 등에 진출했다.

1980년대 삼성그룹 다각화와 관련해 주목할 또 하나는 해외현지법인 및 현지 공장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1978년 7월 삼성전자가 미국 내 자사제품 판매 제고를 위해 뉴욕에 Samsung Electronics American Inc.를 설립한 이래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외국진출이 활발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