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최원식 인하대교수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
가파르기 짝이 없던 한반도정세가 평창올림픽을 고비로 돌아서 급기야 4·27선언에 도착했다. '완전한 비핵화'를 명기한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선포한 데 화답하듯 3천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이 구름같이 모인 메인프레스센터가 장관이다. 남과 북이 미·중은 물론 일본에조차 박대받던 게 바로 엊그젠데, 사람이고 국가고 스스로 모욕한 뒤 남의 모욕을 받는다는 옛말 그대로다. 남북 불화의 틈에서 활개치던 불법 중국 어선도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자취를 감췄단다. 남과 북이 서로 존중하니 온 세상이 우리를 존중한다.

이명박정권 이래 지속된 반북공세로 우리 품을 떠난 한반도문제가 내재화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장소 덕도 봤다. 이전처럼 평양이었더라면 오고가고 번거로움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판문점(板門店)에서 회동하니 저절로 간편해서 더 성과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판문점의 주소가 흥미롭다. 주소가 두 개다. 북한 주소는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판문점리고 한국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원래는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이었다. 장단콩으로 겨우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장단군은 분단체제 최대의 피해자다. 38선으로 군 자체가 남북으로 분할되고 전후에는 거의 전지역이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묶였으니, 팔자도 기박하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빛이 돋았다. 휴전회담장이 개성 내봉장(來鳳莊)에서 널문리로 옮겨오면서(1951.10.) 판문점이 전쟁을 구원한다. 길고 지루한 담판을 거쳐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비록 불완전할망정 3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이 중지되었다.

판문점이 다시 한반도를 구원한다. 휴전 이후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으로 재설정된 채 민간인에게는 거의 망각된 공동경비구역(JSA)에 빛의 축제가 쏟아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잡고 그 군사분계선에서 '월남'과 '월북'을 시연함으로써 판문점 이데올로기가 햇볕 아래 드러난 바, 미 CNN이 '누들외교'라고 예찬한 평양냉면까지 거들어 휴전협정 65주년 만에 정전을 종전으로 이끌 4·27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만인의 기쁨으로 주조할 기적을 연출한 판문점 주소가 예사롭지 않다. 어룡리, 물고기가 변해 용이 된다. 우리나라가 어변성룡(魚變成龍)할 길지가 분명타.

흔히 한국의 경제적 성공을 '라인강의 기적'을 빗대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엄중한 군사지역으로 묶여 통행조차 금지된 하구를 지닌 한강은 기실 한 일이 없다. 나는 재작년에야 강화 북단 연미정(燕尾亭)에 올라 처음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한강 하구를 보았다. 만시지탄(晩時之歎) 속에 새삼 고장난 한반도의 허리를 상기했다. 판문점 선언은 그 치유책이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조성하겠다는 조항이 주목된다. 10·4선언(2007)의 '서해평화협력지대'보다 나아간 바, 바로 NLL이 직접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철도와 도로가 이어지는 것과 함께 평화수역이 설치된다면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가 고립된 최전선에서 남북협력의 상징으로 변신할 날도 머지않다. 한강 하구도 기지개를 켤 것이다. 남북연락사무소가 설치될 개성까지 염두에 두면 인천과 경기도는 남북협력의 최고 실험실로 떠오를 터,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과연 경인지역이 곳곳에 웅크린 악마들을 다스리고 어변성룡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