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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인은 여전히 우리곁에 있다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막 말문 터진 아이의 말 속에도
미세먼지 덮인 가로수 초록빛에도
시 한구절쯤은 반드시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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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과장
시인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시 창작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시 합평회를 하고, 방학에는 문학 기행을 떠났다. 해외여행을 떠나면서도 좋아하는 시인이 살고 있던 독일을 가장 먼저 일정에 넣었다. 독일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냐고 무작정 메일을 보내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시인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가 살고 있던 도시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돈을 아껴가며 산 시집 한 권 한 권이 소중하던 시절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시절이 무색하게 언제부턴가 시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루하루 뭔가를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신났다.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그때는 굳이 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의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영화조차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만 골라 보던 그때의 나에겐 시야말로 가장 맞지 않는,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장르였으니 말이다. 시와 멀어져서 지낸 기간은 생각보다 꽤 길었다. 가끔 '이렇게 시를 읽지 않고 살아도 되나' 싶었지만, 자기 전에 가끔 생각났다가 아침이면 어느새 잊혀졌다. 그렇게 좋아하던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찾아 읽었는데도 낯설 기만 했다. 독일까지 찾아갔던 그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나 자신조차 어리둥절해질 지경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작년에 젊은 시인들과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게 되면서 새삼스럽게 시와 다시 마주했다. 내가 사랑하던 시들과는 전혀 다른 시들에 낯설어하던 시간도 잠시, 시와 그 시의 창작자들을 만나는 시간은 잊고 있던 시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아줬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순간의 평화로움을 기억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시를 접하는 빈도도 잦아졌다. 서점에 가면 지나치던 시집 코너에서 서성이고 하루에 한 편씩 시를 핸드폰으로 보내주는 앱도 깔았으니 예전만큼은 못해도 확실히 시와 가까워지기는 한 셈이다.

최근에는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시인 개인의 삶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삶의 개별 여건이 시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현실에서 살아가는 시인들의 모습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고 하면 정확하겠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의 삶은 쉽지 않다. 최근 한 조사에서 '2016 한국의 직업정보'를 발표했는데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이 바로 시인이었다. 시인의 평균소득은 542만원으로 2015년 1천864만원이었던 평균소득이 1천300만원 가까이 하락했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996년 발표된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이라는 시다. 당시 시 한 편의 원고료는 3만 원, 요즘 시 한 편의 원고료는 문예지 기준으로 15만 원이다. 22년 동안 4배가 오른 셈이지만 금액으로 따지면 12만 원이 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시집은 원고료보다도 덜 올랐다. 3천 원 하던 시집은 이제 8천 원, 한 권 팔릴 때마다 시인에게 800원이 돌아가는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소금 한 됫박은커녕 껌 한 통도 사기 어려운 돈이다. 그런데도 시인들이 '밥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해서 쓰는 이유는 밥만큼이나 영혼이 중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이지만 시와 시인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까맣게 잊고 살던 나처럼, 당신 역시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막 말문이 터진 아이의 말 속에도, 미세먼지에 가려져 잊고 있었던 가로수의 초록빛에도, 영혼 없는 출근길 지하철 속에도 시 한 구절쯤은 숨어 있다. 생각해보면 5월이야말로 시와 참 잘 어울리는 달이다. 이번 한 달만이라도, 당신 곁의 시 한 편을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보다 시는 가까이에 있으니까.

/정지은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