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효심 담겨 보전이 곧 나라 살리는 일
조선인들의 심장과도 같았던 '소나무 길'
부동산개발업자·도의원·공무원의 탐욕에
무너진 200여년 역사 복원 온전히 지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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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1901년 4월 화성의 팔달문 일대는 수원 백성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 조선에 대한 상당한 지배권을 갖게 된 일본인들은 경부철도 노선을 안양을 지나 지지대 고개를 뚫고 서문 밖으로 팔달산 뒤쪽을 관통하여 상유천- 대황교 동편을 지나는 노선으로 계획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원 백성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들어오는 길은 황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곳이었고, 팔달산은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華寧殿)이 있는 곳인데, 일본인들이 이곳을 훼손하자고 하니 수원 백성들이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수원 백성들은 비단 수원에서만이 아닌 서울에 올라가서까지 지지대고개와 노송지대의 훼손 반대 시위를 지속했다.

이에 철도원(鐵道院) 총재 유기환은 사그내-지지대 터널 공사에 반대해 군산포(軍山浦)-사시현(四時峴)-대대동(大垈洞)-서둔동(西屯洞)-상유천(上柳川)을 지나는 노선을 주장했다. 결국 경부철도 노선은 수원군민의 의지대로 수원읍치에서 서북쪽으로 에돌아 군포-부곡-수원역-병점으로 확정됐다. 정조의 유적을 지키고자 하는 수원 백성들의 승리였다.

수원의 백성들이 경부철도 노선까지 변경시킬 정도로 너무도 중요하게 여긴 지지대 고개 일대의 능행차로는 소나무가 가득했다. 정조는 수원신도시를 조성하면서 수원의 모든 지역을 개혁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조선 사회는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산림이 황폐화되어 산에는 나무 한그루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지역에 소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를 심어 식목정책의 산실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소나무를 심은 곳이 바로 수원으로 들어오는 지지대 고개 아래의 능행로였다. 능행로 좌우로 심은 소나무는 조정과 수원유수부의 특별한 관리를 받으며 높고 반듯하게 자랐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에도 이 소나무들은 능행로 좌우에 서서 거대하고 화려한 행차를 보았을 것이다.

조선이 사라지고 일제강점기가 되었어도 이 길은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1번 국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나무들의 보존을 위한 수원 백성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비단 경부철도를 막은 것만이 아니라 소나무와 길 자체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것이기 때문에 수원 백성들은 이 길을 보전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요,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날 노송지대는 단순한 소나무 길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역사적 의미가 담긴 노송지대가 몇몇의 부동산 개발업자들과 경기도의원, 그리고 공무원들의 결탁으로 훼손되었다. 정조의 유지를 받들고, 차량 매연에 소나무를 보호하고, 여기에 더해 효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인다는 명분으로 노송지대의 기존 길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명분 찾기였고, 실제로는 노송지대 일대의 땅에 대한 문화재보호구역을 철회하여 엄청난 토지 시세 차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지난 200여년간 이 땅을 지키고자 했던 수원 백성들의 역사는 이들의 돈 욕심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진실이 밝혀졌다.

수원시와 경기도는 경기도기념물 19호로 지정된 이 길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이제 정조가 효심과 조선의 개혁을 위해 심은 소나무들도 몇 그루 남지 않았다. 우리의 탐욕 때문에 이 소나무와 길을 죽일 수는 없다. 노송지대에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의미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200여 년 전의 소나무와 정조의 혼과 효심이 담긴 역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황홀하다. 그리고 이 길은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굽은 소나무와 주변 숲이 어우러진 이 길에서 역사와 미래를 꿈꾸어 보았으면 한다.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