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찾아보면 그러한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긋이 바라보고 잘 듣고 조용히 일하는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울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시대는 어쩌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제 우리는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누구의 아내 혹은 누구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핵심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한다는 점에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꿈과 욕망을 채워주거나 보완하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 일종의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여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직장을 다니는 노동자들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나 꿈보다는 기업 '총수'의 꿈을 채우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한진 사태는 그 결정판이다.) 아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 세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투명인간을 넘어 '잉여'로 취급당하고 있는 시대이다. 아이들이나 노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는 실종되고 부모가, 사회가 요구하고 규정하는 존재로서만 살아간다. 모두가 '가면을 쓴 존재'이거나 '투명인간'이 되고 있다.
'나의 아저씨'에서 보여주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만나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현재 그 사람이 하는 일이나 직위나 연령, 성별, 외모 등을 제쳐놓고 오직 그 한 사람을 마주할 때 비로소 영혼을 보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판단중지'의 연습을 필요로 한다. '판단중지'는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을 포장하고 있는 그 무언가로 판단하고 대우한다. 우리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상대방을 빨리 파악해서 내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 판단에 근거해서 내게 유용한 인간과 불필요한 인간으로 나누는 훈련을 반복한다. 이 일상에서 탈출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대부분의 배제와 불평등과 차별은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달싹거리는 아이의 입술에 주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의 느린 말투에도 집중한다. 진짜 필요한 훈련은 아이의 돌출 행동에 당황하지 않는, 절망적인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는 몸부림을 품어줄 수 있는 연습이다. 비오는 날, 달팽이의 느린 걸음을 함께 지켜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 훈련이 필요하다.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출발점은 그렇게 작은 풍경에서 시작된다.
찬란한 슬픔과 놀라운 기쁨이 가득한, 2018년 봄이 지나간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초목을 보면서 햇살과 빗방울만으로 가능한 매일의 기적을 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잘 찾아보면 그러한 근거와 증거는 무수히 많다. 이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일은 지긋이 바라보고, 잘 듣고, 조용히 일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것만으로 풍요로운 삶이어야 한다.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