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경남 진주에 구(具) 씨와 허(許) 씨가 살고 있었다. 구씨는 장사 수완이 좋았고 허씨는 만석꾼 집이었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창업 이념은 첫째도 인화(人和) 둘째도 인화(人和) 셋째도 인화(人和)였다. 영업에 강한 구씨와 숫자에 밝았던 허씨의 조화로 기업은 승승장구, LG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가문의 동업은 고 구인회-고 허만정, 구자경- 고 허준구, 구본무(LG회장)- 허창수(GS 회장)에 이르기까지 68년간 지속됐다.
구씨와 허씨의 회사 분리는 부자간·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일상화 된 우리 기업들에 회자 될 만한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 회사 하나 더 갖겠다는 잡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너 리스크 무풍지대 LG'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LG LCD 설립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필립스사의 크리스털 리 전 회장은 LG에 16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파트너를 찾기 위해 모든 기업을 둘러봤지만 구씨와 허씨가 50년 이상 동업자로서 아무 잡음 없이 경영하는 걸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는 기업이 양보와 타협, 신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구본무 회장은 "동업은 결혼과 같은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전혀 다른 남녀가 함께 사는 것처럼 동업자도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LG그룹의 경영을 논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정도(正道)경영'이다. 구인회 창업 회장은 도박이나 술 등 사행성 산업은 물론 '먹고 마시는 것'과 연관된 소비성 사업, 부동산투자 사업을 엄격히 금지했다. 구본무 회장도 "아무리 어려워도 목적 달성을 위해 편법을 동원하는 모럴 해저드에 빠져선 안된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정도경영'을 해야 한다"고 임원들에 늘 당부했다.
LG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구본무 회장이 20일 만 73세로 별세했다. 구 회장은 생전 "인재 발굴 육성이야말로 기업의 가장 큰 책무"라고 강조했다. 국내 대기업 중 최초로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은 것은 구 회장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다. 100세 시대에 이제 불유구(不踰矩)인 그의 갑작스런 비보는 아쉬움을 넘어 한국 경제의 큰 손실로 기록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