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은 생전에 쿠바산 시거를 피우며 군복을 즐겨 입었다. 양복은 서구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멀리했다. 그러던 그가 2006년부터는 세 줄이 선명한 아디다스 운동복만 입었다. 외국 국가 원수는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날 때도 늘 그 '추리닝'이었다. 아디다스가 쿠바 올림픽 대표팀을 후원하기 때문에 입는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카스트로는 "군복보다 편하고 사진도 잘 나와서 입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2009년 타임지는 그런 카스트로를 '옷 못 입는 지도자' 7위에 올렸다.
그런 타임지가 2011년 3월엔 '카다피의 패션: 황제에게는 일부 미친 의상(Crazy Clothes)이 있다'는 특집기사를 통해 이젠 고인이 된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의 패션을 분석했다. 카다피는 공식 석상에 늘 루이뷔통 선글라스를 쓰고 전통의상을 입었다. 갈색 계통을 선호했지만 황금색이나 보라색 의상도 자주 입었다. 그는 드러내고 싶은 메시지를 옷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능했다. 2009년 이탈리아를 방문해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는 전통의상 대신 제복을 입었는데 그 가슴엔 오마르 무크타르 리비아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20년간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점령한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1974년 11월 야세르 아라파트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은 체크무늬 터번에 군복, 그리고 권총집을 허리에 차고 "한 손에는 올리브나무 가지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싸움에 나선 전사의 총을 들고 나는 오늘 이곳에 왔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연설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의 군복 패션은 국제테러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아라파트가 핍박받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변신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한국을 방문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파격적인 패션이 화제다. 검은 가죽 재킷 차림으로 공항 패션을 한껏 뽐내더니 '필리핀 동포와의 만남' 행사에선 위 단추를 풀어헤친 짙은 남색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외국 정상들과 만날 때마다 그의 파격적인 옷차림은 늘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그가 터무니없이 옷을 입는 게 아니다. 두테르테 대통령 패션에는 부패를 척결할 강력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지도자의 패션을 가리켜 '패션 정치'(Fashion Politics)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두테르테는 만만한 대통령이 아니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