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상반신 탈의 시위 등…
시선처리 논란으로 벌어지는 사건
남녀간 권력 재분배 함의 거부 당연
역사는 기득권 저항 넘어서며 발전

폭력 현장에서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는 도처에 잠복해 있다. 남녀 관계라고 예외일 리 없다. 그런 까닭에 페미니즘 논란이 최근 시선 처리를 매개로 펼쳐지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시선 처리에 내재해 있는 남녀 간 권력 문제가 이제 수면 위로 부상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먼저 지난 2일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이 전개했던 상반신 탈의(脫衣) 시위를 보자.
이들은 페이스북에 따져 물었다. 남성의 맨 가슴 사진은 문제가 안 되는데, 여성의 맨 가슴 사진은 왜 음란물로 분류·삭제되어야 하느냐. 이러한 항의는 바라보는 주체의 문제로 귀착한다. 남성의 가슴과 달리 여성의 가슴이 음란한 것은 남성의 자리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때 여성은 바라봄의 대상(객체)으로 전락하여 '보여주다/ 보여주지 못한다' 판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불꽃페미액션의 시위가 일부 남성들의 비난에 직면한 까닭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시선권력 체계에 교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표방하고 출마했던 신지예 후보는 선거 포스터로 인해 논란에 휘말렸다.
포스터는 반측면 얼굴과 도도한 시선, 자신감을 내비치는 다문 입술의 옅은 미소가 특징이었는데, 이는 도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기실 수성(守成)하려는 후보가 안정감을 내세우는 반면, 공성(攻城) 위치에 자리 잡은 후보는 진취성을 강조하는 것이 선거 전략의 상식이다. 그러니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는 별 문제될 바가 없다. 그렇지만 그 도도한 시선이 페미니즘과 결합하는 순간, 이는 기존 시선권력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자리매김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포스터를 찢거나 뜯었으며, 또 누군가는 담뱃불로 눈 부위를 지져 버리기까지 했다.
모 변호사가 "개시건방진" "더러운 사진"이라면서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라고 분노했던 것도, 감정의 근원을 의식하였을지 모르겠으나, 지켜야 할 무언가에 대해 도전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 터이다.
아주 오랫동안 남성은 사회 활동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 왔다.
정치라든가 경제 영역, 사회 조직 등에서 누군가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여부가 남성의 존재감을 결정해 왔다는 것이다. 문명에 입각한 제도가 구비되기 이전에는 육체 능력이 존재 증명의 지표였으리라. 그러한 까닭에 남성의 시선은 힘의 행사 여부가 결정되는 외부를 향하여 고착하게 되었다.
반면 여성은 제한된 공간 내에 머무르는 상태에서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 왔다.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여성의 시선이 유지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여성은 자신이 타인, 특히 남성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묶이면서 외부가 아닌 스스로를 주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존 버거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성은 여성을 다루기 전에 우선 관찰한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남성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은 그녀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깨달은 여성은 비로소 그 순서를 스스로의 내부에 수용하게 된다. 관찰자로서의 여성은 피관찰자로서의 여성을 타인에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녀 자신에 의한 그녀의 모범적인 행동은 그녀의 사회적 존재를 결정한다."('이미지') 시선권력 관계는 이처럼 관찰자로서의 남성과 '모범적인' 여성의 공조를 통하여 그동안 커다란 불협화음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남성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불온한' 여성들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존중받고자 한다.
제한된 공간 바깥으로 뛰쳐나와 사회의 당당한 일원임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시선 처리 논란은 그로 인하여 벌어지는 사건이다.
물론 이는 사회적인 존재 방식에서 남녀 간 권력 재분배를 함의하고 있으므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는 언제나 기득권의 저항을 넘어서면서 발전해왔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