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실망으로 체념 섞인 한숨소리만
생사확인 등 北 거부하자 우리측 받아들여
추첨 탈락자들 '언제될지 모르는' 비극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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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날 만찬장에서 남북 정상이 술까지 곁들였다는 보도는 '정말 이번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더구나 그로부터 꼭 한 달 뒤, 젊은이들이 '번개'하듯 남북 정상이 다시 판문점에서 만났을 땐 '모든 이산가족이 상봉할것'이란 생각에 가슴까지 뭉클했다. 더욱이 문재인 대통령은 실향민 2세대고 이산가족 상봉 경험도 갖고 있지않은가. 누구보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이산가족이면 누구나 1세대인 부모님을 모시고 평양이든 영변이든 함흥이든 마음껏 다녀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번 역시 일회성 보여주기 행사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금 이산가족들을 엄습하고 있다.
우선 지난 22일 남북관계자들이 금강산 호텔에서 만나 오는 8월 20~26일 남북 각 100명씩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행사를 금강산에서 열기로 합의했다는 보도는 귀를 의심케 했다. 처음엔 '1000명'에서 '0'이 하나 빠진 줄 알았다. 5만7천여명의 이산가족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15년 10월 20일 20차 이산가족 상봉 때보다 가족 수가 더 줄었다. 남북 각각 100명이라니. 여기저기서 실망으로 가득 찬 이산가족의 체념 섞인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난 20차 행사의 상봉 확률은 662대 1 이었다. 추첨장에는 머리가 하얗고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추첨 과정을 지켜보다 최종 탈락한 고령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쓸쓸히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컴퓨터를 이용해 500명의 1차 후보자가 선정됐다. 여기서 다시 400명을 탈락시킨다. 최종 경쟁률은 569대 1 이었다. 애초에 탈락한 이산가족도 그렇지만 100명에 들지 못하고 다시 탈락한 실향민에겐 이 과정은 너무도 가혹하다. 그런데 박경서 한적 회장은 어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선정되신 분들은 축하를 드리고, 선정되지 못하신 분들은 다음 기회에 꼭 한을 풀어드리겠다". 이 말은 "이번에 당첨된 분들은 축하한다. 떨어진 분들은 다음 기회에"로 들렸다.
이번 상봉과 관련해 대한적십자사의 변명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측이 상봉 규모를 남북 각각 200명으로 확대하고 전면적인 이산가족 생사 확인, 이산가족 고향 방문, 상봉 행사 정례화 등을 요구했는데 북한이 거부했다고 한다. 그걸로 끝이다. 그랬으면 우리도 협상을 거부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무엇이 두려웠던지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일회성 정치 이벤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한번에 100명씩 1년에 네 번의 상봉이 이뤄질 경우, 생존하는 3만5천960명의 고령이산자의 상봉이 성사되려면 99년이 걸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산가족 고령자가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도 다음 상봉은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산가족이 원하는 건 오직 한가지다. 만나게 해 줄 능력이 안되면 생사 확인만이라도 해 달라는 것이다. 북측 가족이 사망했으면 이제 모든 '희망'을 접을 것이고, 다행히 살아 있다면 서신 교환으로 안부만 묻겠다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도 어려운 부탁인가. 분단의 최대 희생자인 이산가족들의 이 정도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그가 누가 됐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논할 자격이 없다. 상봉 재개로 이산가족의 끔찍한 희망고문도 다시 시작됐다. 이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