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하루살이떼' 표현은
불가가 지향하는 정신적 高處
시조 양식의 개척과 변형 통해
스님이 바랐던 眞相의 세계일 것
지난 5월 말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신흥사 조실이었던 무산 큰스님이 입적하셨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묵객들에게 늘 "한 그루 키 큰 무영수(無影樹)-된바람의 말"로 계셨던 스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언어와 표정과 흔적을 남기고 떠나셨다. 마음 아득하기만 하다. 스님이 쓴 시조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빈약하기만 한 우리 시단에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깊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극점을 보여준 바 있다. 스님은 '재 한 줌'이라는 작품에서 자신이 결국 무(無)로 돌아가 천지만물과 섞여들 것이라고 예감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서 무로 돌아가신 것이다. 또한 스님은 '침목(枕木)'이라는 작품에서 역사를 떠받쳐온 모든 순간이 다 철로를 가능케 해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어느 한순간도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전언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아무리 어두운 세상의 억압을 받는다 해도, 쓸모없어 버림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모두 "긴 역사의 궤도를 받친/한 토막 침목"의 역할을 저마다 감당해낸 것이다. 이제 스님과 나눈 모든 순간들이 하나하나의 침목이 되어 역사 저편으로 흘러갔다.
스님은 1968년 '시조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후, 삶에 대한 독창적 해석과 찰나적 오도(悟道)의 순간을 담은 많은 시조 작품을 남겼다. 그의 전언에는 불가적 어법과 세계관이 불가피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조오현 시학을 불가적 전언의 시적 번안으로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만큼 우리는 조오현 시편을 선승의 언어로서만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 그 가운데서도 '시조'라는 양식으로 접근하는 의식적 작업을 긴요하게 요청받게 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의 언어가 선(禪)의 속성과 시(詩)의 속성을 넘나들며 형상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스님에게 '시조'란, 그만의 고유한 미학과 형이상학을 결합한 생생한 언어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미학적으로 빼어나게 구현된 것이 대표작 '아득한 성자'일 것이다.
"하루라는 오늘/오늘이라는 이 하루에//뜨는 해도 다 보고/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죽을 때가 지났는데도/나는 살아 있지만/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천년을 산다고 해도/성자는/아득한 하루살이 떼".
이 작품에서 가장 성공적인 표현은 아무래도 '아득한'이라는 관형어에 있을 것이다. '아득함'이란, 시간적으로는 '오램'을, 공간적으로는 '깊음'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외관상으로는 어지러이 분분하는 '하루살이 떼'를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는 결국 불가가 지향하는 정신적 고처(高處)의 전언인 동시에, 시조 양식의 끊임없는 개척과 변형을 통해 스님이 가 닿고자 했던 진상(眞相)의 세계일 것이다. 그렇게 스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빛을 쬐어주고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거목으로 남을 것이다.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기억될 것은 자명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깊이 기억될 스님이 남기신 그 '오램'과 '깊음'을 마음 깊이 기리고자 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