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 문건은 일종의 헌정유린
권력찬탈 향한 기획이라는 의심
헌법 파괴하고 국민에게 총 겨누는
악마의 지침서란 사실 용서 못해
최근 기무사가 준비했다는 계엄문건 보도를 보면서 40년 전 상처가 떠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던 1979년 10월. 대학은 물론 강의실에까지 경찰과 기관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이 사라지자 대학에는 바로 휴교령이 떨어졌다. 대학에 탱크와 군인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일상이 되었다.
종강도 없이 방학을 했다. 성적이 리포트로 대체되는 사이 12·12가 발발했다. 상황을 짐작한 학생운동권 일부가 잠수를 탔다. 겨울은 길었다. 고시를 핑계 삼아 암자로 도피했던 친구가 월정사 근처에서 조난을 당해 짧은 인생을 끝냈다. 남몰래 민주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던 친구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슬펐다.
그리고 서울에도 봄이 왔다. 하지만 3김에 대한 희망은 정치적 욕망과 뒤섞이면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계엄해제를 외치며, 최루탄으로 범벅이 되는 날들이 길어졌다. 꿈도 대학생활 마지막 봄도 5월 17일 계엄령 확대로 사라졌다. 대학은 또 문을 닫고, 비극적인 광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 계엄령은 크든 작든 국민들의 인생을 흐트러 놓았다. 그해 5월 광주로 입영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던 친구는 다른 시민들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는 오랫동안 방황을 한 후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아마 계엄령이 없었다면 그도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많은 친구들의 삶이 헝클어진 것은 계엄령과 쿠데타 때문이었다.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은 전시·사변 등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하며,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해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2017년판 국군기무사령부 계엄 문건이 문제가 된 것은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 등의 조치를 통해 계엄해제를 할 수 없도록 한 내용 때문이다. 기무사는 일상적인 계엄업무 편람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도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헌법파괴와 내란 예비 음모죄에 해당한다. 그것이 바로 계엄령을 획책한 집단을 찾아내야 하는 이유다.
80년대 계엄령의 경험을 집대성한 67쪽짜리 2017년 증보판을 보면서 소름이 돋는다. 도둑질도 해본 사람이 한다는 옛말을 다시 떠올렸다. 기무사의 계엄문건은 일상 업무를 넘어선 일종의 헌정유린과 권력찬탈을 향한 기획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무사가 헌법을 파괴하고,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악마의 지침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라는 군의 존재 이유를 포기한 것이다. 철저한 수사와 처벌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도 러시아나 중국의 전투기들이 한반도를 넘나든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다. 혹시나 북한의 재래식 무기들이 불법으로 거래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의 141개 방위산업 기술이 안전한지도 걱정이다. 외국의 정보기관들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자국의 국민 보호와 핵심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군인들은 촛불에 맞서 80년대 계엄령을 복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평화를 꿈꾸는 한반도에서 계엄과 쿠데타를 획책하는 일부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하다. 일부 군인들의 권력욕망에 국민들의 삶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자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다시 상처를 들여다본다. 민주화를 바라던 80년대에 서울의 봄이 실현되었다면 국민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계엄령이 없었다면 친구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더 이상 계엄령의 트라우마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김민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