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영역 근본기조 변함 없어
변화 요구 진보의 조급함이나
정략적 발언으로 몰아가지 말라
많은 세력 담대하게 척결 안하면
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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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7월 17일자 지식인 323명 선언에 대해 이른바 좌우협공이란 비판과 함께, '현장 감각 제로 건백서'로 '속대발광욕대규'로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앞의 비판은 한겨레신문, 뒤는 중앙일보의 칼럼이니 어쩌면 좌우협공으로 비치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런 선언을 좌우협공 따위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정략적이다. 촛불의 열망을 딛고 선 이 정부에게 이 선언은 가깝게는 사회경제의 담대한 개혁을 요구하거나 크게 보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권력은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공성에 바탕해야 하며,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맹목적 자본주의에 의한 끝없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공정함이란 주장이 담겨있다. 또한 그동안의 일면적 경제성장에 대한 강박을 넘어 사회와 경제 체제에 민주와 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더 멀리는 지겨운 종북논쟁을 넘어 이 땅의 지속적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했을 것이다.

여기에 좌와 우가 자리할 곳은 없다. 촛불 시민은 흔히 말하는 좌우나, 진보 보수란 프레임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다운 사회를 요구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향 분석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미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에 따른 개혁의 담대함을 요구한 것이다.(2017년 10월 30일자 월요논단) 너무도 오래 우리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서는, 이후의 사회와 인간다움에 대한 요구를 좌우협공 따위의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 선언의 의미를 지나치게 정쟁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촛불이 척결하기를 바란 것은 보수가 아니라, 특권을 독점하는 음습한 수구 세력이다. 그 세력을 우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런 세력은 벌써 사라져야 했음에도 여전히 우란 이름으로 이 정부의 실패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이 선언을 좌우협공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런 세력에게 정치적 권리를 합리화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차라리 맹랑한 비난은 중앙일보 송호근의 글이다. 그는 이 선언에 대해 "정말 미쳐버리기 전에 외치고 싶다. 제발 현장에 가봐라"고 질타한다. 내가 아는 한 이 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 현장에 가까이 있었던 이들이다. 이렇게 질타하는 그는 어느 현장에 있었는가, 혹시 을과 병이 죽어간다고 외치는 그 현장이 아니라, 이런 구조적 모순을 만든 갑들이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현장은 아니었던가. 나는 을의 현장에서 그를 본 적이 없다. 이와는 별개로라도 그가 주장하는 해법은 정면으로 촛불 정신에 반대된다. 을과 병의 싸움에 을의 양보를 말하고, 규제완화를 말하는 주장 어디에 이 정부가 해야 할 개혁의 정신이 담겨있는가. 구조적 모순을 초래하는 갑의 체제에는 침묵하고, 그나마 을이 가진 한 줌의 밥그릇을 병에게 양보하는 것이 대안인가. 건물주, 가맹점주, 대기업의 약탈적 구조와 시스템을 규제하라는 촛불의 요구에 규제완화를 말하는 것이야 말로 '속대발광욕대규'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의 문제는 특권적 지대를 독점하는 그들의 배타적 결탁에 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그들만의 축제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사법농단이 얼마나 반민주적이며, 우리 사회의 근본적 합의를 도외시하는 반체제적 사건인지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기업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지대독점 세력이 얼마나 이 사회의 암적 존재인지 애써 감추려 한다. 기무사 문건에서 보듯이 벌써 사라졌어야 할 독점적 세력이 여전히 이 정부의 실패를 바라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사회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영역에서 이 사회의 근본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교육영역에서만도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지식을 전 산업화 시대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지만, 입으로는 4차 산업혁명을 말한다. 그러니 이 개혁 요구를 진보의 조급함이나 정략적 발언으로 몰아가지 말라. 거론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그 세력을 담대하고 당당하게 척결하지 않으면 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신승환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