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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수원 화성 풍경은 꼭 이랬다. '서문은 서 있고 동문은 도망가고 남문은 남아있고 북문은 부서졌고'. 그때, 공심돈 옆 무너진 성곽에서 연을 날리며 가끔 이런 상상을 했다. 왕도 여기에 서서 저 들판을 쳐다보았을까. 무너져 내려 초췌한 화령전 돌담길을 지날 때는 왕도 이 길을 걸었을까. 서문에서 북문으로 한달음에 뛰면서도 이 성곽 길을 왕도 걷지 않았을까. 왼쪽으로는 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앞으로는 멀리 광교산의 우람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오는 방화수류정을 찾았던 그 뜨거웠던 여름날, 왕도 여기에 올라 저 연못에 비친 물그림자를 보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때는 정조가 대단한 왕인지도 몰랐다. 어린 우리에게 그저 뛰어놀고 기어오르던 성곽에 불과했던 화성이, 그때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쌓았던 눈물의 성인지도 몰랐다. 성이 조금씩 복원되고 떨어져 나간 문이 제자리를 찾아 그 형태가 온전히 돌아오자 비로소 정조가 위대한 군주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조의 8일간 화성 행차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1795년 윤 2월 14일 11시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수원행궁 낙담헌을 나와 강무당을 거쳐 성곽 길을 밟았다. 북문인 장안문에 이르러 "전에 성 밖에 개간할 만한 땅이 있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장용외사 조심태는 서북쪽 대유평을 가리켰다. 왕은 화홍문을 거쳐 방화수류정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어릴 적 상상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정조는 담 길과 성곽 길을 걸어 방화수류정에도 올랐다.

그로부터 223년 후, 그때 정조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화성의 진가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수원 야행'이 8월 11·12일, 9월 7 ·8일 두 차례에 나눠 진행된다. 올해 타이틀은 '밤빛 품은 성곽도시, 2018 수원 문화재 야행'이다. 이번 수원 야행은 야경(夜景)·야화(夜畵)·야로(夜路)·야사(夜史)·야설(夜設)·야식(夜食)·야시(夜市)·야숙(夜宿) 등 8야(夜)를 주제로 저녁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진다. 8월에는 화성행궁과 행궁광장, 공방길, 신풍동 일대에서, 9월에는 장안문에서부터 화홍문에 이르는 수원화성의 성곽 길, 방화수류정, 수원천 변에서 진행된다. 모두 의미 있고 가슴설레는 야행이지만 개인적으로 2차 야행이 더 마음에 끌리는 건 순전히 어릴 적 추억 때문일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