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고 적응해야 할 폭염 체면에서 벗어나자
공공기관 '불경스러운 복장' 편견 깨졌으면
반바지는 '품위'·'단정한 차림'이기 때문에
열대야를 넘어 최저기온이 30도를 넘는 '초열대야' 현상까지 나타났다. 밤낮으로 계속되는 폭염에 몸과 마음 모두 지칠 대로 지치니 반바지 얘기를 꺼내려 한다. 웬 반바지?
지난 3일 오후 수원시 만석공원에서는 '팔천만 송이 무궁화 꽃이 수원에 피었습니다'라는 주제로 나라꽃무궁화축제가 열렸다.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행사에 반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수원시장이 반바지를 입고 연단에 올랐다는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시원해 보여서 좋다", "아무리 그래도~" 다양한 반응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공식행사에 참석한 이유가 있다. "남자 직원입니다. 너무 더워 반바지 입고 출근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는 거죠?" 이달 1일 수원시공무원노동조합 익명 신문고에 올라온 글이다. 이 공무원은 연일 폭염을 기록하는 날씨에 더운 긴바지 대신 시원한 반바지를 입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해당 글은 순식간에 690명이 조회할 정도로 수원시청 내부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얼마나 더웠으면 반바지 출근을 생각했을까? 이제 기후변화로 인해 폭염은 일상화되고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속 시원한 대책보다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일상 속에서 적응하고 견디어 내야 할 문제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기후복지' 개념이 여러 정책에 스며들 것이다. 기후변화를 시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 사회 안전망을 다진다는 개념으로? 저소득층 취약층을 대상으로 겨울철 난방 바우처 제도 시행처럼 폭염 바우처 역시 확대 시행될 것이다. 무엇보다 초고령화, 다문화 사회 변환, 사회·경제적 격차 심화로 인한 기후변화 취약계층에 대한 지자체의 선제적인 대응의 필요성도 확대된다. 가장 큰 변화는 태풍·집중호우·가뭄·지진처럼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폭염을 지원 항목에 넣자는 각계각층의 요구가 제도로 정착된다. 옹벽과 건물 외벽은 덩굴성 식물의 식재가 의무화된다. 모든 건축물의 옥상은 텃밭 등 사계절 푸른 녹지공간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사상 최악의 폭염이 이어지면서 여름 풍경을 바꿔놓았다. 폭염은 격식과 체면을 따지기보다는 실용과 효율성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엔 멋을 위한 액세서리의 대명사 양산.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던 양산은 살인적 폭염 아래에선 남녀 불문하고 생존 필수품에 가까워지고 있다. 양산을 쓰면 두피에 가해지는 열을 최대 10℃ 이상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엄숙주의도 더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최근 영국의 남자 중학생들이 폭염 속에서 엄격한 복장 규정에 맞서 치마등교시위를 벌였고, 프랑스 버스운전자들이 반바지 착용이 거부되자 치마출근시위를 벌여 화제가 되었다. 물론 이들의 애교 섞인 시위는 파장을 일으켰고 복장 규정의 유연함으로 이어졌다.
반바지 출근을 자유롭게하자. '반바지 출근 가능할까요'로 시작된 수원시 공직자의 익명게시판에 수원시장인 저부터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행사장에 반바지를 입고 등장했었다. 여성전용물로 여겼던 양산이 남녀불문으로 확대되듯 반바지에 대한 선입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체면과 격식에 어긋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적어도 머뭇거리고 눈치 보지는 말자는 취지에서다. 이미 일상에 젖어있는 문화를 갑자기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민원인께서 반바지 입고 근무하는 대민 직원들의 모습을 어색해 할까? 야간 근무자, 청소 용역, 휴일·현장 근무자, 재난상황실 등 24시간 근무자에게 반바지를 입고 업무에 임할 수 있게 한다면? 왁싱에 대한 얘기도 나올 것이고 반바지에 구두를 신을지, 샌들을 신을지, 운동화를 신을지 얘기가 오갈 것이다. 견디고 적응해야 할 폭염. 체면에서 벗어나자. 부디 공공기관에서 반바지를 입는다는 것이 정장이나 격식 있는 옷차림까지는 아니어도 '불경스러운' 복장으로 여기는 편견 정도는 깨졌으면 좋겠다. 나는 반바지를 입는다. 반바지는 '품위'와 '단정한 복장'이기 때문에.
/염태영 수원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