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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아침이다. 73년 전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광복 그날의 풍경은 이랬다. "그때, 분명 그때, 뜰에는 이상한 여름꽃들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원추리와 능소화 같은 낯선 꽃들이 우리를 그렇게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8월의 하늘을 향해 마치 용(龍)의 비늘처럼 번득이며, 솟구치는 한 폭의 깃발이 있었다. 성조기도 아닌, 유니언 잭도, 청천백일기도 아닌, 더더구나 일장기도 아닌, 처음으로 보는 그 깃발이 우리들의 어린 가슴을 북처럼 자꾸 두들기고 있었다."

벼락같이 다가온 해방. 처음 태극기를 보았을 때의 감흥을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 이어령은 이렇게 썼다. 태어나서 처음 본 이상야릇한 깃발이었지만 무엇이 어린 가슴을 두드렸다. 비단 이어령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73년 전 오늘 그 또래들에게 해방이 준 선물인 '태극기와의 조우'는 그런 흥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은 광복 73주년이다. 하지만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건국을 둘러싼 논쟁으로 '광복절'은 이제 공휴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소년 이어령과 그 또래의 가슴을 두드렸던 환희의 '그날'이 아니다.

그제 '대한민국 건국 70주년 기념 토론회- 건국일 끝장토론'까지 열렸다. 우파 진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정부가 탄생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좌파 진영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주장한다. 양측의 격앙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실 내년이 더 두려워진다. 이미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일을 대한민국 건국일이라고 선언한 상태다. 정부는 내년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칠 모양이다. 그러니 진보와 보수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도산 안창호의 나라 사랑은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된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다. 망하게 한 책임자가 누구냐. 그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손톱을 박게 하였으며,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 팔기를 용서하였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나 자신이다." ' 겨레의 스승' 도산 안창호는 망국의 원인을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리려 하지 않았다. 모두 우리 책임이라는 것이다. 광복절 아침, 좌·우를 향해 "정신 차려라!" 소리치는 도산의 호령이 귓가를 두드리는듯하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