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하면
소통통해 먼저 풀어 나가야
그 뿌리 사회에서 정치로 뻗었다면
치유의 출발은 사회안에 있다는것

새정부 들어 인사청문회의 기준이 흔들리면서 여당의 '적폐청산'에 야당은 '내로남불'로 맞섰다. 6년 전의 국가정보원 여론조작사건(혹은 대선개입사건)과 작년부터 발생한 드루킹 댓글조작사건은 행위자와 이해당사자가 다를 뿐 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여론형성을 심각하게 왜곡한 사례들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이어 '국가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야당은 '촛불혁명'을 초래한 국정농단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여당은 시장과 국가의 역사적 성패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내로남불은 주로 정치의 언어로 사용되지만, 돌아보면 그 뿌리는 넓게 퍼져있다. 정치인 팬덤현상들도 제3자의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깨시민'이나 그들의 비판대상이나 진리에 있어서는 똑같이 독선적이다. 내부자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참여연대나 비정규직 문제해결은 정부와 재계에 넘기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만을 옹호하는 민주노총도 다르지 않다. 워마드는 이른바 미러링으로 변명하면서 그들의 비판대상인 '한남'을 닮아갈 뿐 아니라 범죄를 예고하는 일탈을 쉽게 벌인다. 일부 기독교계는 입국 금지된 이슬람국가에 들어가 선교하면서도 무슬림의 국내 입국에 대해서는 공포증을 조장한다. "롤리콤은 범죄지만 쇼타콤은 취향"이라고 말하는 교수나 여성과 남성의 비혼에 대해 근거 없이 상반된 기준을 들이미는 교수의 편협한 시각도 이제 낯설지 않다.
어쩌면 내로남불은 전 사회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은 옳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상황논리로 변명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 옳거나 다 틀렸기 쉽다. 더 아쉬운 사실은 서로 분열된 집단 내에서 상대에 대해 동의하거나 이해하는 목소리도, 자기 집단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도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양성, 토론과 합의, 그리고 양보와 협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넛지'의 저자인 캐쓰 R. 선스타인은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책에서 이러한 집단의식의 모습을 '집단극단화'로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유사한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극단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내부 다양성은 저하되며, 나아가 상대집단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것이다. 집단 내부에 동일한 성향의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일반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일수록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보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 공간은 더 신속하고 폐쇄적인 정보순환을 가능하게 하여 집단극단화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선스타인은 집단극단화를 막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전통주의 혹은 선인들의 지혜에 대한 존경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과거를 시대적 한계가 아닌 적폐로 치부하는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다. 결과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미래에 적용하는 대안이 있지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으며 인물과 조직의 대체를 선호한다. 마지막 대안은 견제와 균형이다. 링컨이나 루스벨트가 그랬듯이 동조하는 집단들로 이루어진 '정보의 반향실'이 아닌 반대하는 집단들로 '정보의 풀'을 넓히거나, 유유상종을 회피하고, 제도적으로는 3권 분립과 헌법상 독립기관의 권위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마저도 '청와대정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같은 뿌리의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찾기 어렵다.
우리에게 남은 대안이 있다면,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는 샤무엘 스마일즈의 말처럼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하여 먼저 내로남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뿌리가 사회에서 정치로 뻗어나간 것이라면 그 치유의 출발은 사회 안에 있다는 말이다. LA흑인폭동의 주인공 로드니 킹은 사건 이후 진행된 인종 간의 분노와 혐오, 그리고 좌절을 겪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린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