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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성시연 퇴진 이후 경기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자리는 공석이었다. 공교롭게도 경기필하모닉 상주 공간인 경기도 문화의 전당도 내부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지휘자도 없고 연주회장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지난 5월 상임 지휘자로 이탈리아 출신 마시모 자네티가 낙점됐다. 문화의 전당 역시 오는 11일 재개관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재개관 후 첫 번째 공연으로 자네티의 데뷔 연주회가 잡혔다. 이런 스케줄은 의심의 여지 없는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경기필하모닉 역사상 첫 외국인 상임 지휘자, 리모델링이긴 하지만 무려 180억원이 투입된 후 새로 문을 여는 연주회장. 도민의 기대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네티가 8일 경기필하모닉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먼저 공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상 데뷔연주회가 서울에서 열리는 것이다. 도민들은 크게 당황했다. 새집에 입주하면서 집들이를 남의 집을 빌려 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8개월의 보수공사, 상임 지휘자의 공백을 아무런 불평 없이 묵묵히 기다려 준 도민들의 입장에선 '충격' 그 자체다. "'경기필하모닉'의 간판을 떼서 '서울필하모닉'으로 바꾸라"는 열혈팬들의 주장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만일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필하모닉 데뷔 연주회를 뮌헨이나 프랑크푸르트에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음악평론가 볼프강 슈라이버는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필하모닉 데뷔연주회, 즉 베를린 청중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2002년 9월 7일. 첫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베를린필하모닉은 최고의 긴장감과 기쁨을 안고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오케스트라, 언론, 청중의 반응을 그저 행복감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뭔가 모자라는 듯했다. 은발의 곱슬머리가 뿜어내는, 상냥하면서도 힘찬 자태와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생동감이 베를린을 뒤덮었다. 새로운 예술감독에게 거는 기대가 치솟아 올랐다. 베를린 청중은 그를 신뢰했고, 래틀 역시 베를린 청중을 신뢰했다'.

경기도민도 그런 감동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기대는 무산됐다. 서울에서 먼저 연주하던 관행, 서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전 지휘자 한 명으로 충분하다. 이제 이런 한심한 행위가 더는 자행돼선 안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