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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7일 자 신문에는 무심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스쳐 갈 부고 기사가 귀퉁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원출신 49세 소장 미술사학자 오주석(吳柱錫). 생전 그는 언론의 조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진흙 속의 진주인 채로 젊은 생을 마감했다.

어디에서건 우연히 잡은 그의 책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을 꼼꼼히 읽은 사람들은 그의 이력 중 '2005년 2월 5일 백혈병으로 별세'라는 마지막 글귀에 이르면 백이면 백 "아!"라는 탄식을 내뱉게 된다. 그 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는 이 책에 흠뻑 빠진 사람이다. 그날 밤 그는 오주석의 생애가 궁금하고 "왜 내가 그의 강의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까"라며 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오주석이 가장 사랑했던 화가 김홍도의 '씨름'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22명인데 오른쪽 위의 중년 사나이를 보세요. 입을 헤 벌리고 재미있게 보고 있죠? 재미있으니까 윗몸이 쏠렸죠? 그 옆 장가든 친구는 씨름판에 오자마자 팔베개를 했군요. 씨름판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얘기죠. 왼쪽 관람객 중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는 갓도 삐딱하게 쓰고. 하여간 성격도 소심하고 영 시원치 않죠?' 이런 해설에 일반 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들도 열광했다. 입에서 입으로 알려진 이 책은 스테디셀러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해설을 다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다.

오주석의 호는 '후소(後素)'다. '논어'에 나오는 '그림은 먼저 바탕을 손질한 후에 채색한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에서 따왔다. '사람은 좋은 바탕이 있는 뒤에 학문과 지식을 더해야 함'을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새털처럼 가벼운 '예능 인문학'이 판치는 지금, 인품과 학식 모두 출중했던 오주석이 더욱 더 그리운 것이다.

인문학 도시 수원에 오면 화성 말고도 반드시 들러야 할 새로운 명소 하나가 더 생겼다. 지난 5일 개관한 '열린공간 後素 '다. 행궁 인근 사가(私家)를 수원시가 사들여 오주석의 공간으로 꾸몄다. 1층은 전시실, 2층은 생전 오주석이 모은 자료와 책들로 '오주석의 서재'가 복원됐다. 13년 전 타계한 한 젊은 미술사학자를 과감하게 다시 불러낸 수원시의 결단도 놀랍거니와, 무엇보다 수원은 '오주석의 서재'로 인문학 도시의 튼튼한 초석이 마련됐다. 그를 수원의 문화콘텐츠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이제 그건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