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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뮌헨회담을 막 끝내고 돌아오던 1938년 9월 30일 그 날, 런던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영국 국민들은 공항까지 마중 나와 '평화협정서'를 들고 온 그를 뜨겁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외쳤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졌다!" 언론은 그가 총리 재임 중 기사 작위를 받는 영국 역사상 두 번째 인물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언론도 있었다. 영국 국민 앞에서 그는 히틀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번 약속하면 믿을 수 있는, 협상 가능한 합리적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역사는 아무리 과정이 좋아도 결과가 형편없으면 실패한 것으로 기록된다.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29일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테란트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더 이상의 영토 요구는 없다"는 히틀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듬해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역사는 늘 아이러니다. 1945년 독일이 패배에 직면했을 때 히틀러는 자신이 궁지에 몰린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뮌헨이었어. 1938년 전쟁을 시작했어야 했어"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뮌헨 회담은 '선의에 의존하는 협상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명제를 후세에 각인시켜 주었다. '적의 도발 앞에서 준비 없이 평화를 애걸하면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도 남겼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을 때도 '뮌헨의 교훈'이 인용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 내 강경파들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뮌헨 회담을 잊지 말라"며 전쟁을 독려했다.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며 존슨 대통령은 "나는 체임벌린이 아니다"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역사는 지금도 체임벌린을 협상으로 평화를 얻으려다 더 큰 불행을 자초한 '무능한 총리'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940년 11월 눈을 감은 그는 사전 유언장에 "뮌헨이 없었다면 우리는 1938년 파괴됐을 것이다. 나는 결코 역사가의 평가가 두렵지 않다"고 적었다.

내일은 뮌헨회담이 열린지 꼭 80주년 되는 날이다. 굳이 달력을 뒤적이면서까지 이날을 떠올리는 건 남북·한미회담에 이어 북미회담이 논의 중인 지금, 우리에겐 왠지 그냥 넘길 날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이영재 논설실장